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6호 http://
“절대 딴 곳에 쓰지 않습니다!”

서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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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둬버릴까?
한 달에도 몇 번씩 그 생각을 한다. 매 번 죄인취급 받는 것도 싫고 설명하는 것도 지겹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도 매일 똑같은 말을 한다. 어쩌면 그렇게 짜기라도 한 듯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저희가 다른 곳에 쓰려는 것이 아니고요, 단지 확인하는 데에만 씁니다.”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쯤 되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심정에 동감할 것이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 대신에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을 내밀 때마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10손가락 지문도 다 찍어줬고, 99년 주민등록증을 바꿀 때도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서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았다. 그래서 내 지갑 한 구석에는 은행이나 동사무소가 원하는 주민등록증이 잘 모셔져 있다.
그렇지만 요즘은 일부러 여권을 가지고 다닌다. 주민등록번호가 모든 정보의 킷값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 대체신분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런 작은 갸륵함에 비해 너무 많은 고난이 따르는 게 현실이다.
몇 일전에도 운전면허시험을 보러 가서 여권을 내미니까, 직원이 ‘지문 찍으셔야 하는데요’한다. ‘본인 동의하에 찍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전 찍을 생각 없어요’ 했더니 고참인 듯한 사람이 조용히 뒤로 데리고 가, 설득을 시작하는 것이다.

“저희가 다른 곳에 쓰려는 것이 아니고요, 단지 본인을 확인하는 데에만 씁니다.”
“제 여권이 있는데 뭘 확인하죠?”
“요즘은 위조여권이 많아서요”
“여권과 제 얼굴이 같고 응시원서의 사진도 같잖아요”
“열 손가락 다 찍으려는 것도 아니고요, 찍는다 해도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다. 은행직원도, 가스 검침원도, 동사무소 직원도 항상 같은 말을 한다. ‘절대 딴 곳에 쓰지 않습니다’,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라고 이야기해도 도무지 통하질 않는다. 그래서 항상 대접전을 치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이나 지문이 없이 업무를 끝내고 나면, 나도 오기가 생긴다.

“내가 관두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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