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6호 북마크
‘환히 들여다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들
<개인정보가 팔리고 있다>, 제프리 로스페더 지음, 김희숙 옮김, 한마음사 1994

윤현식  
조회수: 5393 / 추천: 52
" oo카드입니다. **은행 우량고객이시군요. **은행 우량고객에게는 특별한 혜택으로 카드를 발급하고 있습니다.” 백수건달쯤에 가까운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치고는 의외의 것이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우량고객이라는 것이 뭔데요?” 그러자 최근 통장의 잔고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으며, 은행거래 중에 채무관계가 발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 카드 회사가 어떻게 내 정보를 이렇게 상세히 알고 있을까.
한편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 불쾌하기도 해서 은행이 이 정보를 제공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럼요, 당연하죠. **은행과 OO카드는 고객 서비스를 위해서 제휴를 맺고 있거든요.” 그 은행과 카드회사가 제휴를 맺고 고객의 정보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개인정보 그 자체가 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가 발달한 정보화사회로 들어오면서 개인정보의 유출문제가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왔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개인정보의 유출은 있어왔다. 그런데 과거의 개인정보유출이 특정인에 대한 특정한 시기의 사실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현재의 개인정보유출은 말 그대로 개인의 모든 사생활에 걸쳐 있으며 특정 개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개인정보유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과거의 개인정보 수집은 흥신소 직원 같은 전문업자들(?)에 의해 그들만의 노하우로 이루어졌지만, 현재의 개인정보 수집과 유통은 매우 공공연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개인의 비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각도에서 투영되는, 말 그대로 ‘환히 들여다보이는 집’에서 현대인은 살아가는 것이다.
제프리 로스페더(Jeffrey Rothfeder)가 적절히 묘사한 ‘환히 들여다 보이는 집’의 거주자들은 이미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특정인에 대한 모든 기록은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함으로써 앉은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록들 안에는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개인의 모습은 물론이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할 내밀한 사생활의 기록까지 담겨있다.
한 개인의 기록은 다만 유출되고 팔려나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작되고 이용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사람이 졸지에 경찰 데이터베이스에서 전과범이 되어 있고,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 우생학적 열성유전자 보유자로 전락해버린다. 한 정보판매업자의 말처럼 프라이버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프라이버시나 남의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건 시간의 낭비라고 갈파하는 그 정보판매업자의 말은 현상을 가장 명확히 짚어낸 말일 수도 있다.
국가, 기업, 개인 할 것 없이 도처에서 개인정보의 유출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양상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제프리 로스페더는 소설을 쓰듯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릴러 영화를 보듯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정보가 팔리고 있다, Privacy for Sale>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듯이 묘사한다. 그런데 이 책이 10년도 더 전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입맛이 씁쓸하다.
제프리 로스페더가 발로 뛰면서 개인정보유출의 온갖 폐단을 짚어내어 프라이버시 없는 세상이란 마치 상쾌한 공기가 사라진 세상과 같음을 경고하려했다면, 저자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라는 것은 그래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번역마저도 거의 10년 전에 이루어졌던 이 책이 경고했던 프라이버시 없는 세상이 이미 21세기 남한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요한 언급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밝힌다. 즉, 자신에 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개개인은 소극적이 되며, 정책결정자들의 의지에 종속되고 그 결과 창조적, 생산적 시민이기를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프라이버시는 결국 개개인에 국한된 가치가 아닌 사회 전체의 가치로 전환된다. 개인의 존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프라이버시는 지켜야할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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