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7호 사이방가르드 [사이방가르드 (Cyvantgarde) 문화 실험]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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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고 인간 감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시도는 먼 과거부터 존재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실험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을 우리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불렀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이 182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관찰하면서 붙인 이 말은, 줄곧 사회에 복무하는 예술의 해방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였다.

생시몽의 개념에 부합하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이제부터 ‘사이방가르드(Cyvantgarde)’라는 개념을 꿔다 쓰겠다. 필자가 보는 사이방가르드의 덕목은 우선, 자유로운 실험 정신이다. 다차원적인 미디어 실험은 디지털 예술에 오면 더욱 빛이 난다. 둘째로 예술의 자기 함몰적이고 주관적인 자세에 대한 극복이다. 방법에 있어선 집단적 창작이 수시로 모색될 수 있겠고, 관점에 있어선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는 예술이 발굴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정신이다.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숨어든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 저항이 예술가의 당연한 덕목이 돼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이러한 전제 조건을 갖춘 아방가르드로 단연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앙상블이 다년간에 실험하고 정리한 디지털 네트워크 공간에서의 저항 이론은 새로운 디지털 실천 방식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들이 지닌 기술 현실 비판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예술적 재능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 맥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유용할 뿐이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이 펼친 중요한 퍼포먼스로는 우선 에이즈 위기에 대한 미국 정책을 비판하면서 플로리다에서 이루어졌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뉴욕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 영국 쉐필드에서 벌어진 ‘실업자들을 위한 국제 끽연 캠페인’에서의 거리 시위, 유전공학의 위험성을 알리는 ‘신(新)이브의 컬트’라는 제목의 유럽 순회 공연 등이 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같은 국제적 디지털 예술가들의 각종 모임에서도 시연, 강연 등을 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94년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저술을 벌이고 있는데, 뉴욕 아우토노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이제까지 발간된 다섯 권의 게릴라 포켓북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저항 전략과 전술을 모색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교란(The Electronic Disturbance)>(1994)에 이은 <전자적 시민 불복종(Electronic Civil Disobedience)>(1995), <디지털 저항(Digital Resistance)>(2001), 이 세 권 모두는 움직이는(nomadic) 권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유목적 저항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두 권의 책, <신체 기계(Flesh Machine)>(1998)와 <분자 습격(Molecular Invasion)>(2002)은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시도되는 신체 관리의 유전학적 미래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앙상블의 책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온라인상에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앙상블은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 또한 이들에게 ‘예술가’란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오히려 ‘문화 노동자’의 지위에 처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적극적 의미를 살려 예술가를 ‘미디어 전술운동가(tactical media practitioner)’라 칭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의 운동이 바로 ‘미디어 전술운동’이다.

미디어 전술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아방가르드의 저항 정신을 고무한다. 그들의 창작과 실험은 모두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질기고 영구적이다. 일상에 미치는 미·거시 권력들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가는 길밖엔 없다. 서서히 끈질기게,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확장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 http://www.critical-ar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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