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8호 영화
‘실미도’ 그리고 1968년...

이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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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에 대한 정면도전(?)
위의 말은 어떤 영화주간지의 기사 제목이다. 이 말처럼 <실미도>는 과연 국가주의에 정면도전을 했을까? 답은 정면도전이라기 보다는 피해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것도 매우 교묘하게...

이 영화의 시작이기도 한 1968년은 흔히 ‘68혁명’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세계적인 혁명의 시기였지만, 불행하게도 분단국가인 남한의 68년은 1.21사건과 2일 뒤 곧바로 이어지는 미국 프에블로호 감금사건으로 인해 남북의 긴장이 매우 높아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해에는 두개의 중요한 법이 새로이 만들어진다.

향토예비군법과 주민등록법이 그것인데, 향토예비군이나 주민등록증을 간첩(?)과 연결시키면서 남북한간의 긴장을, 박정희 자신의 권력안정화를 위한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 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한편 베트남에 전투병을 파병한 남한으로서는 68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로 인해 곤란에 처해지는데, 미국이 베트남에서 발을 뺄 준비에 들어간 시기였고, 남한내의 미군감축도 이미 예정된 때문이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 북한은 매우 강한 어조로 파병을 반대했었다(실제로 북한은 베트남 전쟁시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이러한 복잡한 국제정세와 국내의 상황에서 박정희는 ‘684부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책임자나 군장성의 지시로 이 부대가 만들어진 것처럼만 묘사하고 있으며, 박정희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당시의 박정희에 의한 엄혹한 군부독재 시기에 어떻게 일개 책임자 몇 명이 이러한 작전을 꾸밀 수 있는가? 물론 극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상업영화라고 하더라도 영화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언급을 피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이 영화는 애써 외면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또한 국가라는 일종의 가부장적인 권력에 대해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누구도 거역하지 못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은 당연하게도 거부하거나 거역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드러날 듯 한데 전혀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인다. 단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가장 소극적인 도전인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겪고 있는 레드컴플렉스의 극복 또한 전혀 없다. 국가에 의해 강요된 연좌제나 레드 콤플렉스가 최근까지 남한사회를 지배해온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임에도 이 부분에 대한 주인공의 극복은 없다.

따라서 국가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는 문구는 홍보성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

마초영화의 전형
당연히 군인들만 나오는 영화이기 때문에 마초적인 요소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 남성들간의 의리, 폭력, 계급 간의 위계질서만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이들이 단순한 폭력배에서 인간병기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세밀한 심리묘사나 냉혹하고 고통스러운 훈련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어떻게 국가가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설득력은 이 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얻어터지고 맞고 죽을 뻔하고 이런 과정에서 마초적 요소들은 부각되는 반면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전혀 없다.

뻔한 조폭영화들처럼 의리 때문에 결국 함께 자살한다는 결말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
지난 연말 전세계에서 ‘반지의 제왕 3편’과 대결하여 유일하게 이긴 영화, 개봉 한 달만에 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1000만 명의 관객이 동원될 것인가로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 ‘실미도’... 이 영화가 이처럼 엄청난 흥행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제작사 시네마서비스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영화의 개봉관이 최고일 때는 380개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국의 상영스크린수가 1100여 개라고 할 때, ‘반지의 제왕’과 ‘실미도’가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 수가 전체의 절반이 넘는 실정에서 나머지 소규모의 영화나 작가의식이 강한 한국영화들은 설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스크린쿼터를 통해 문화적인 다양성을 이야기하였다면, 이제는 자국 내에서 몇 편의 영화가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들이 극장에 가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모두 ‘실미도’같은 부류의 영화들이라면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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