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9호 영화 [다큐멘터리 - 송환]
실패한 혁명가, 고집불통 노인네, 그리고 만나고 싶은 아버지

이현정  
조회수: 3621 / 추천: 59
얼마 전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의 다큐멘터리 <송환>이 표현의 자유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는 몇 가지 점에서 놀라움을 주었다. 선댄스영화제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며 재기발랄함과 의미심장함을 동시에 혹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인디펜던트영화들의 집합소 같은 영화제이다. 그런 선댄스영화제에 대하서 줄곧 ‘저 나라 영화제’이며 ‘저 사람들 축제’라고만 생각했는데 문득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비디오대여점에서 선댄스영화제 수상작이라던가 초청작이라는 문구를 보면, 거의 들어보지 못한 제목의 영화라도 선뜻 빌릴 수 있는 정도의 선호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늘 ‘저 쪽 얘기’라고 느꼈던 것은 그 동네에서 인디펜던트 영화라고 부르는 것들과 우리가 ‘인디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놀라움은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때문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런저런 일들로 인해) 근간에 그렇게도 얼굴 부서지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그런 일들 중에는 14년 동안 진행해 온 <송환>의 편집 과정에서 받는 안팎의 막중한 스트레스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북미든 한반도든 인디펜던트에 경향은 있을 지언정 유행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김동원 감독이 스트레스 끝에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지 끈기나 아쉬움 같은 것만으로 지탱하지 못했을 강한 어떤 힘을 알고 느끼고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작업이 14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을 때 경향이나 유행은 힘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 힘이 되었을까?

<송환>은 사실 2000년에 있었던 송환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무려 12년 전인 1992년 남파 간첩으로 체포되어 장기 복역을 한 후 출소한, 겁나는 두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시작된 얘기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리를 스쳐가는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들 때문에 글을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이 한정된 지면에서 딱 한 가지만 조리 있게 얘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욕심 없이 많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한두 가지 생각을 조리 있게 쓸 수 있지만 욕심을 부리면서 난삽한 생각에 묻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오리무중의 횡설만 날릴 거라는 불안함까지 있다. -.-) 14년 동안 촬영을 한 카메라맨의 숫자와 그들이 사용했을 카메라 기종만큼이나 여러 차원의 이야기들이 있고, 14년 동안 이삿짐만큼 쌓였을 테잎 더미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양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면서 어떤 장면에서 증폭되는 나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 중에서 나는 이 영화가 가족 관계의 회복에 대한 영화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 여기서 가족이란 개별적인 가족과 상징적인 가족을 포함하며 개별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상징적인 한민족임을 포함한다.

영화는 ‘이 작품을 감독의 아버지와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바친다’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반공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화를 내셨을 것이고 공산주의자인 선생님들도 만족하시지 않을 것 같다는 ‘자유주의자’ 감독의 말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거나 선생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자신의 위치를 슬쩍 드러낸다. 이념의 좌우에 분명히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감독은 의견은 있으나 주장하지 않는 태도로 근원적인 마찰을 원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북으로 송환된 조창손씨가 자신을 아들처럼 생각했었다는 말(만일 조창손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을까 궁금하다)을 듣고, “아들로서 아버지 조창손 할아버지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것 같은 부끄러움이 이 작품을 끝낼 수 있게 한 힘”이라고 고백한다(이 나레이션에 이어지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나레이션인데 “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이다).

이념적으로 화합하거나 동화될 수 없는 이 땅의 아버지들과 아들들은 싸우기보다는 만남을 도모하길 원한다. 끝장 볼 때까지 싸워서 우열을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아니라 만나고 만나고 자꾸 또 만나서 친해질 때라고 얘기하고 있다. 공유했던 역사의 시간이 거의 없는 내 아이들과는 쉽게 할아버지가 될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실패한 혁명가이기도 하고 고집불통의 노인네이기도 했던, 쉽지 않은 시간들을 가까이 보낸 후 어쨌든 만나고 싶은 아버지가 되었듯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정치인들이 판문점을 넘나들고 경제인들이 협력을 해서 상품이 오간다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원초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듯이 말이다.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만나게 된 관객인 나에게도 그들은 실패한 혁명가거나 고집불통 노인네가 아니라 그 이상 혹은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들 중 안학섭씨와 류한욱씨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안학섭씨는 김선명씨와 함께이 출소할 때 받은 화환의 차이를 지적하며 ‘스타의 상품화’를 날카롭게 꼬집었는데 그 꼬장꼬장함은 현자의 통찰처럼 자극적이었다. 시라소니와 절친한 친구였다는 류한욱씨는 “구약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전쟁한 역사를 다룬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기거하던 꽃동네 대표신부에게 “나는 성경을 다 읽어 보았는데 당신도 맑스 좀 읽어 보세요”라고 권한다. 사람 좋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대표 신부가 바보 같아 보였다. 그 곳을 나와서 동지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가는 차 안에서 류한욱씨는 “이 사람아, 술 안 먹고 무슨 재미로 살아”라며 웃는다. 장기수들에게 가졌던, 의식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잘 떨쳐내기 힘들었던 이미지들을 상당히 교정시킨 건 이빨 다 빠지고 기력 없어 누워 지내야 했지만 호방한 류한욱 할아버지였다.

<송환>을 얘기하기에 이 글이 턱없이 부족한 것처럼 2시간 반이라는 이 영화의 런닝 타임은 장기수들을, 게다가 장기수들과 지낸 감독의 14년을 담기에 지극히 짧다. 어딘가 겁나지만 어딘가 매력적인 일군의 할아버지들을 보고 싶으면 극장으로 가면 된다. <송환>은 3월 19일부터 예술영화전용관인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서울, 제주, 목포, 광주, 부산, 대구, 김포 소재)에서 개봉한다. 극장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진보넷 참세상 방송국이나 민중의 소리 방송국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상영회를 신청할 수 있다. 보고 싶은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할 영화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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