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9호 북마크
다 보여줄 것인가, 다 볼 것인가?
홍성욱,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2002.

윤현식  
조회수: 5535 / 추천: 68
정치적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속칭 ‘민쯩’을 까봐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엄하신 나랏님과 국회의원 나리들에게 쓴 소리라도 한 번 하려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이 고스란히 드러나야 한다. 국민의 입까지도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법률로 규정되게 생겼다.

게시판 실명제는 개인정보가 통제를 위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개인정보를 감시와 통제에 이용하려는 발상은 비단 “대~한민국”의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자국 출입 외국인 전부의 생체정보까지 수집하고 나섰다. 에셜론을 통해 전 세계의 통신수단을 감시하고, 위성을 통해 지표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낱낱이 탐지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개개인의 신체정보 자체를 이용해 전 인류에 대한 감시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개별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정보수집과 이를 이용한 감시와 통제는 이제 국경을 초월한 문제로 전화한다. 가히 ‘글로벌 파놉티콘(Global Panopticon)’의 구축이다. 전자적 장치를 이용한 정보망의 형성은 곧 초국경적 감시망을 형성한다. 거기에는 이미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곳은 곧 감옥이다. 쇠창살이 주변을 빼곡히 채우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결정권이 자신의 의사에 의해 행사되지 않는 곳은 감옥과 다름없는 것이다. 정보사회는 공유와 소통을 위한 유토피아의 희망을 우리 앞에 던져주는 대신 그 뒤로는 모든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정보감옥(information prison)’을 만들어 놓는다.

벤담(Jeremy Bentham)이 고안한 파놉티콘은 푸코(Michel Foucault)에 의해 훈육의 기제로 재탄생된다. 파놉티콘은 직접적인 감시와 통제를 통해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인식 자체에 내화시킴으로써 규율로 기능하는 효과를 가진다. 소위 복종의 내면화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만들어진 전자적 파놉티콘은 이 효과가 극대화된다.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오히려 자발적으로 감시에 협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편리와 안전, 효율이라는 가치가 개입된다. 감시를 하는 주체는 감시당하는 주체에게 이들 가치와 개인정보를 교환하도록 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이 아닌 합의를 동원한다.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에서 저자는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이 어떤 형태로 되어 있으며, 파놉티콘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푸코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의 의견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술의 발전과정에서 어떻게 응용되었고, 특히 오늘날 정보화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이 책은 정보사회가 정보감옥으로 기능할 때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어떻게 소멸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파놉티콘에 대응하는 ‘시놉티콘(Synopticon)’, 즉 ‘권력자에 의한 감시’가 아닌 ‘권력자에 대한 감시’를 통해 말살의 위기에 처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어려운 말을 피하고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더구나 분량이 그리 길지 않고 문고판형이라 책값도 싼 편이다.

저자는 “프라이버시가 죽었다고 선언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권리라는 것은 보편성과 영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항상 합의되고 타협된 것들’이라는 점을 든다. 그런데 이러한 낙관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결정주의에 입각한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권리에 대한 ‘합의와 타협’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무엇인가가 사전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의 종말은 인간사이의 ‘합의’나 ‘타협’에 의해 선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놉티콘적 역감시가 과연 얼마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역시도 의문이다. 정말 “프라이버시가 죽었다”고 선언하고 싶지 않지만,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프라이버시권’은 조만간 폐기된 권리항목의 묘역에서나 찾아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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