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0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공미연  
조회수: 3913 / 추천: 58
극장 안은 온통 ‘태극기..’가 휘날리고, 극장 밖은 온통 눈이 쏟아지던 그날, 극장에 갔다. 천만관객시대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가는 한가로웠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겠다는 특별한 계획은 없었는데, 함께 영화 보러가자고 한 친구가, ‘빌 머레이(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에 대해 침 튀기며 이야기하기에, ‘사랑의 블랙홀’을 기억하며 미스터리(?)하면서도 흐뭇한(?) 러브스토리에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았다.

제목을 보고 ‘혹시 언어가 다른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러브스토리가 아닐까’하는 기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각자 언어(말하는 방법, 태도, 단어 선택 등)가 다르니,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누군가가 정말 통역이라도 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그렇게 보자면 정말 서로 소통이 되길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분홍색 팬티만 입은 여자의 엉덩이만 나온다. 모로 누운 자세의 그 엉덩이는 육감적이기보다는 나른함이 묻어난다. 막 도쿄에 도착한 중년배우 역시 피곤한 눈으로 낯선 공간을 응시하지만 그저 지치고 힘들뿐이다. 결혼한 지 25년 된 중년남자, 그것도 미국 내에선 유명세를 치르고 있지만 광고 촬영차 낯선 일본에 온 그 남자. 남편의 출장 때문에 일본에 온 결혼 2년 차의 여자.

아, 왠지 통속적인 러브스토리의 냄새가 풍길 조짐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통속성을 낯선 일본이라는 공간을 끌어들임으로써 유쾌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온통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속에서 영어조차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소통불능’이 오히려 이 두 사람을 소통하게 만든다.

영화의 원제인 ‘Lost In Translation(번역 속에 사라지다)’이라는 제목처럼, 개개인의 감정과 정서, 원하는 것은 쉽게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대화란 타인의 언어가 끊임없이 자기 나름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는 늘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대화를 하는 것, 누군가와 소통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서 주인공이 배구공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 떠올려 보면, 어쩌면 어떤 오해와 편견 없이 주인공의 말을 받아들여 줬기 때문에 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믿고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서로’ 소통하길 원한다.

그/그녀가 “왜 나를 사랑 하니?”라고 묻는 말에 딱히 대답을 찾지 못 할 때, 그렇다고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라고 스스로 혼란스러워 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단박에 뒤집을 수는 없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있지만, 표현 할 수 없는, 표현되지 않는, 소통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쩌다 생활과 일에 싫증이 나거나 힘들 때, 혼자라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이런 낯선 공간조차 그들을 더욱 혼자가 되게 만든다. 일본이라는 공간은 낯설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사람들은 대개 절망하게 된다.

사실 이런 절망이 금세 ‘희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주 순간적이다. 이런 절망의 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자신을 달리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목욕탕에도 가고, 거리를 쏘다녀 보기도하고, 명상을 하기도 하고, 꽃꽂이를 배우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고, 깨어 있기도 하고,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누군가 이런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나도 너와 같은 처지이지만, 아마도 다 잘될 거라”고 이야기 해 준다면 조금은 이 시간을 지나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까.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내가 이루는 공간에서 나와 그대가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온전히 소통하기 위해서는 ‘소통불능’의 상태를 인지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소통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완벽하게 그/그녀를 알고 있다고, 알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여기서부터 ‘번역되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졸려서,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드는 장면은, 52살의 중년 남성이 25살의 연인(?)의 맨발을 손으로 잡는 것으로 로맨틱한 버전을 떠올리던 관객들의 모든 기대를 저버리지만, 악수를 하듯, 그녀의 다친 발을 만져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찾아낸 특별한 언어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준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

P.S. 극장밖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정말 낯선 기분에 한껏 들떠서 누군가에게 이런 문자를 띄우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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