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0호 이동영의
e-번호 : 전화망과 인터넷의 결합

이동영  
조회수: 4648 / 추천: 57
우리 주변에 두개의 큰 통신 네트워크가 있다. 바로 인터넷과 전화망이다. 지금까지 이 둘이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오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통신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전화망은 오랜 동안 써왔기 때문에 친숙하고 일상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다.
한편 인터넷은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고 기술적으로 앞서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꿈의 통신기술로 소개되었던 화상전화가 바로 인터넷에서 화상채팅으로 현실화되어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화’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전화망과 인터넷
사실 인터넷과 전화망은 사용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 정도 결합되어 있다. 인터넷 회선을 이용한 값싼 국제전화가 그 예이다.

전화를 사용하는 양쪽 사용자에게 바로 연결된 양쪽 끝부분은 전화망을 통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 부분은 값비싼 국제회선에 비해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인터넷을 통해 연결하는 것이다.

한때 관심을 끌었던 다이얼패드도 인터넷과 전화망을 연결시킨 또다른 예이다. 아직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아예 전화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터넷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인터넷폰도 있다. 즉 전화망과 인터넷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에서의 음성채팅이나 화상채팅이 전화에 비해 값싸고 기능도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화가 많이 보급되어 있고 사람들이 전화에 더 익숙하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이메일 주소보다는 전화번호를 더 잘 알고 있고, 상대방이 컴퓨터를 켜고 앉아 있을 가능성보다는 전화기 옆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모든 연락처는 e-번호로 통한다
e-번호(ENUM, Electronic NUMbering 또는 tElephone NUmber Mapping)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전화망과 인터넷을 통합하기 위한 핵심기술이다. e-번호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인터넷상의 모든 연락처까지도 전화번호 형식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이메일 계정에도 ‘전화번호’가 부여되고, 음성/화상채팅도 ‘전화번호’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연락 방법은 ‘전화번호’ 한가지로 통일된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로부터 전화를 가진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고, 전화기를 가진 사용자가 컴퓨터 앞에 있는 사람과 음성채팅을 할 수도 있다. 이메일과 팩스도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 한 사용자가 가진 각각의 통신수단마다 다른 번호를 붙이는 대신, 하나의 e-번호로 이들 모두와 연결할 수 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사용자마다 기존의 전화번호와 같은 모양의 e-번호를 부여한다. e-번호를 전화번호와 같은 모양으로 하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전화망과 인터넷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화번호와 같은 형식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현재 대부분의 기관이나 가정, 개인들이 이미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e-번호를 기준으로 그 사람(혹은 회사, 기관, 가정)에 관련된 모든 연락처를 저장한다. 이메일 주소, 유선/휴대전화 번호, 팩스번호, (앞으로 일반화될) 인터넷폰 주소, 홈페이지 주소 등등이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e-번호(즉 전화번호)를 찾아본다. 그러면 그 사람에 관련된 연락처들이 나오고, 그 중 적당한 방법으로 연락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이 실용화되면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홈페이지 주소, 메신저 아이디 등을 따로따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e-번호 하나면 모두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e-번호는 예전에 알아보았던 인터넷 도메인 네임(www.jinbo.net과 같은 이름) 시스템을 이용해서 구현된다. 국가번호, 지역번호까지를 포함한 전화번호(이를 E.164 형식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진보넷의 전화번호는 +82-2-774-4551이다) 형식인 e-번호를 도메인 네임 형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화번호의 숫자를 역순으로 배열한다. (1554477228) 그리고 각 숫자 사이에 점을 찍고 마지막에 .e164.arpa를 붙여서 도메인 네임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1.5.5.4.4.7.7.2.2.8.e164.arpa) 이것을 도메인 네임과 같이 DNS를 통해 관리한다. 1.5.5.4.4.7.7.2.2.8.e164.arpa를 검색하면 ‘유선전화 +82-2-774-4551, 팩스번호 +82-2-774-4551, 이메일 jinbonet@jinbo.net, 홈페이지 http://www.jinbo.net’ 등의 정보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사용자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는 기존의 전화번호/이메일 주소/홈페이지 주소 대신 e-번호를 사용하기만 하면 전화기나 컴퓨터가 알아서 연결을 해 줄 것이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e-번호의 실제 용도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폰이다. 특히 시외나 국제전화의 경우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이다. 숫자 자판밖에 없는 휴대폰을 이용해 인터넷 검색을 할 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인터넷 도메인 네임에 비해 비교적 공정하게 분배되고 관리되는 전화번호 체계를 쓴다는 점도 한편으로 의미가 있다.

네트워커의 독자라면 어느 정도 눈치 챘겠지만, e-번호 시스템은 연락처에 대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e-번호의 기반이 되는 도메인 네임 시스템에서 모든 정보가 완전히 공개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프라이버시 침해의 위험성은 더 심각하다. e-번호가 스팸메일 발송자나 스토커에게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또다른 문제로 e-번호가 개인식별번호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개인정보를 추적하고 결합하는 열쇠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e-번호는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위험성은 더욱 크다. 전화망에 비해 인터넷에서 도청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주의할 점이다.

e-번호는 모르는 사이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e-번호 시험서비스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e-번호가 일반화되면 통신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 변화의 와중에 사람들의 프라이버시가 다치지 않도록 처음 만들 때부터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