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1호 사람들@넷
“투쟁을 위한 밥을! 밥을 위한 투쟁을!”

이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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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심한 어느 날 저녁이었다. ‘투쟁과 밥’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비루 씨의 아파트. 비루 씨, 구로구 씨, 메닉 씨, 압듈레몬 씨 등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밥’ 이상의 것...

‘투쟁과 밥’은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이 이렇게까지 장기화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끼 식사 제공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오랫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힘겹게 하루하루 지내는 농성단에게 밥 한끼 이상의 큰 힘이 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이 170일을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식사조차 하기 힘든만큼 농성단의 인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타국에서 투쟁 중인 이들을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역시나 배고픔과 외로움일 것이다. 비루 씨는 불법체류 노동자를 양산시키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모이다...

‘투쟁과 밥’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아나클렌(anarclan.net) 자유게시판 덕분이다. 누군가가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제안에 몇몇 동참의 손길이 모아졌다. 게시판에서 나와 오프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 그러나 온라인 게시판의 이름들은 서로 알고 있었던 터라 논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가칭 ‘투쟁과 식사’로 시작해 일주일 만에 ‘투쟁과 밥’이 발족됐다. 2003년 11월 말의 일이다.

어떤 모임이건 4개월이나 지나면 시스템이 잡혀가게 마련이건만, ‘투쟁과 밥’은 여전히 중심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몇몇은 고정적으로 오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오고 싶으면 오고 여의치 않으면 빠지는 식이다. ‘미안하다’, ‘고맙다’ 따위의 말은 필요없다. 한마디로 어떤 누구도 특정한 책임이나 역할 맡기를 강요받지 않는다.

한때는 ‘맴버/서포터제’로 나누자는 논의가 있었다. 매주 준비할 것들을 책임감 있게 진행하는 사람과 각자 개인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간 날 때 이것저것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한동안 시도해 봤지만 결국 처음대로 완전히 열려있는 모임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특별히 이들에게 온라인 게시판(bab.gg.gg)이 정말 중요한 소통의 공간이다.

누구의 지시도, 정기적인 회의도 없기 때문에, “오늘 몇 시에 시장을 보니까 어디에 모이십시오” 하고 게시판에 올리면 신기하게 알아서들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무런 제한이 없다. 인터뷰 간 기자에게도 식사준비를 돕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문화다.
게시판 운영자가 하는 것은 하루에 3개정도 올라오는 상업성 광고 게시물 지우기 뿐. 모임의 규모나 성격을 규정짓는 울타리가 없다보니 누구나 어떠한 글을 올려도 소통이 가능한 곳이 돼 버렸다.

모금함 들고 집회 쫓아다니기

'투쟁과 밥’의 상징은 ‘밥주걱을 높이 움켜진 손’이다. 마치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 연상될 만큼 웃음 뒤엔 비장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밥주걱 하나로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처음엔 책 팔기, 옷 팔기를 통해 기금을 마련해 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자, 집회가 있는 곳이면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는 전단지와 모금함을 들고 뛰어 다녔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FTA반대시위, 파병반대시위, 반전시위 등 유난히 집회가 많아 다행(!)이었다는 구로구 씨. 초창기 맴버로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그는 “모금함 들고 소리치는 것도, 전단지 돌리며 선전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모금함 뜯을 땐 정말 보람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밥통 샀을 때의 그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한 주 동안 모인 돈은 전부 쌀과 반찬거리를 샀다. 처음엔 밥통도 없어 쌀은 주변의 아는 친구 집에 가서 밥을 지어왔을 정도라서, 한주 한주가 너무 위태로워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열심히 집회에서 뛰어다닌 덕분인지, 그런 때 구세주 같은 손길이 왔다며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꺼냈다. ‘녹색평론 독자모임’에서 밥통 사라며 후원금을 보내준 것이다. 2003년 12월 어느 날의 일이다. ‘투쟁과 밥’은 그 때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로부터 후원금이 꾸준히 들어와, 이제는 재정적으로 많이 안정이 된 상태다. ‘피자매연대’로부터 매달 일정액의 후원금이 들어오고 비정기적이지만 학생회나 개인으로부터 몇 만원씩 후원구좌를 통해 들어온다고 한다.

“투쟁과 X(변수)...”

많이 유명(?)해 진 탓일까. ‘투쟁과 밥’ 친구들은 이제 모금함을 들고 나가지 않는다. 스스로는 “배불러서 그렇다”며 깔깔대며 웃지만, 기자가 찾아간 그날 저녁은 풍동 철거민의 아침식사 조달을 위해 열심히 유부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안정적인 재정으로 이제는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단 뿐만 아니라 다른 투쟁 현장에도 ‘밥’을 지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누군가에 의한 이끎 또는 이끌려짐 없이 개개인의 자유의사만으로도 이러한 지속적인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투쟁과 밥’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투쟁과 집’, ‘투쟁과 술’ 등 다른 여러 가지 지원과 연대의 양식들이 만들어지고 확산될 수 있으면 좋겠다.

(후원구좌: 074-802114-02-001, 우리은행,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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