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1호 사이방가르드
디지털 비평의 선구자들, 크로커와 더리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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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는 인터넷의 대중화와 함께 문화 영역에 소위 ‘사이버’ 담론이 넘쳐나던 시기다. 당시에는 첨단의 문법을 구사하며 후기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경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이에 비판의 날을 치켜세웠던 많은 사이버문화 이론가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 마크 더리(Mark Dery)와 아서 크로커(Arthur Kroker)의 공적은 되짚어 볼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 이들 글 속에서 표현되었던 첨단의 극사실주의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 문법의 파격에 사이방가르드의 실험정신과 비판 능력이 온전히 담겨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먼저, 아서 크로커는 캐나다 콩코르디아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국제적인 사이버문화 웹진 씨시어리(Ctheory)의 편집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신경제 시대의 엘리트 계급의 등장과 이들이 지닌 신화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했다.

크로커의 저서 가운데 <데이터 쓰레기: 가상계급론>(1994), <미래 해킹하기>(1996)는 그의 사고 지형을 읽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그의 <데이터 쓰레기>는 현대 사이버문화 비평서로는 탁월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크로커는 우선 ‘가상경제’라는 새로운 신경제의 분석을 통해 그 본질이 ‘소멸의 경제’에 근거한다고 판단한다. 그 소멸은 노동과 생산물,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고전적인 생산관계 등의 사라짐을 지칭한다. 원격의 글로벌 가상공간 거래로 인해 (실물) 경제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90년대 중반 이후에나 본모습을 드러내는 신경제의 성장을 당시 한발 앞서 내다봤다. 물론 그에게 구경제의 가상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신계급의 출현과 맥을 같이한다. 그가 개념화한 ‘가상계급(virtual class)’은 바로 새로운 시대의 파워 엘리트를 지칭한다.

가상계급의 구성은 이렇다. 미래의 비전을 주도하는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 자본가들과 위계상 한 단계 아래인 하이테크 벤처자본가들, 인공 지능 과학자, 엔지니어, 비디오 게임 개발자, 컴퓨터 과학자들과 여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 기술지향의 정부관료 등이다. 이들의 경제적 기초는 전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산업에 의존한다. 이들 사이의 계급적 협력은 주로 ‘기술적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 프로젝트는 계급간 불협화음을 억제하는 화해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렇듯 견고한 지배의 구조에도 언제나 탈출구는 존재한다. <미래 해킹하기>에서 그는 지배 구조에 대응한 전지구적 대항 세력의 등장을 주목한다. 전자적 공간을 통해 새로운 기술 엘리트들인 가상계급의 논리에 도전하는 소수 저항운동들, 예컨대 원주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해커운동 등에서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마크 더리의 경우 그는 단순히 문화평론을 한다고 말하는 대신, ‘정치’ 문화평론을 쓴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디지털 문화비평의 근저에는 늘 사회 정의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다. 그는 사이버문화 전반에 대한 식견뿐만 아니라 이를 도마에 올려놓고 맛깔나게 손질할 줄 아는 재주도 겸비했다.

그의 사이버문화 초기 저술은 <프레임 워: 사이버문화론>(1994)이다. ‘프레임 워(flame wars)’는 온라인에서 오고가는 신랄한 이바구(입담)를 뜻하며, 이는 네트를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디지털 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편집된 책에서 독자들은 90년대 초반 한창 부상하는 사이버문화의 다양한 관심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중력장 탈피: 세기말의 사이버문화>(1997)는 사이버펑크, 사이버히피, 테크노이교도들 등 정보시대의 디지털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뤘다. 더리는 주류 정치가나 신경제론자들의 논의가 아니라 문화적 극단의 사례들에서 반문화 혹은 저항문화의 단초를 발견한다. 미학적 관점에서 사회의 비정상적 변이들에 관심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착증, 카니발, 음모론, 광기, 초자연론, 곤충학, 성변태, 초현실주의 등등 문화적 극단을 찾아나선다. 이들 주류와 권력에서 빗겨나고, 권력에 의해 추하게 일그러진 돌연변이들의 문화 생산에서 새로운 저항의 동력을 고민하는 것이다.

90년대 크로커와 더리가 구사했던 난해한 잡종식 글쓰기는 사실주의를 극대화하는 고유한 촉매제 구실을 했다. 불투명한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문화이론, 정신분석, 디지털기술 등의 전문 용어들을 뒤섞어 새로운 현실을 설명하려 했다. 사이버, 테크노, 사이키 등등과 연결되는 잡종의 언어들에서 독자들은 근미래의 현실을 조감했던 것이다. 이들에게 새로운 글쓰기 문법은 다가올 사이버 현실을 보기위한 도구였다.

이들의 난해한 문체와 디지털 신조어들은 실지 사실성을 떨어뜨리기보다는 현실과 근미래의 풍경을 보다 풍성하도록 돕는 미장센 효과와 같다. 마치 SF소설의 허구를 사건의 전개와 치밀한 플롯과 소재들로 뒷받침하여 극사실성의 때깔을 입히듯, 이들의 디지털 언어는 낯설고 혼돈스럽지만 변화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동시에 이들은 공히 사이버문화의 좌뇌를 자극한다. 주류 디지털 문화의 상업적 지배에서, 이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의 모습에서, 그리고 화폐로 관리되는 신체에서 우울한 디지털 미래를 감지한다. 이들 둘은 극단의 언어 게임을 통해, 누구보다 앞서 디지털 현실과 미래의 제 모습을 한꺼풀 뒤집어 보여주는 공을 세웠다.

참고 페이지
아서 크로커: http://www.ctheory.net
마크 더리: http://levity.com/markd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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