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1호 만화뒤집기
식탁에 오른 둘리의 손가락
최규석,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김태권  
조회수: 3108 / 추천: 54
노신의 <광인일기>에서 주인공은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고, 독자들에게 그것을 폭로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뜯어먹지나 않을까 하는 화자의 두려움 속에서 소설은 끝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최규석의 만화가 시작한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단편집>(길찾기, 2004)에서 그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세태를 묘사한다.
칼라 만화 <사랑은 단백질>에는 족발을 파는 돼지와 통닭을 파는 닭이 등장한다. 이웃을 잡아먹는 행위는 돼지랑 닭이랑 함께 사는 우리로서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지만 달아날 것인가, 어쩔 수 없더라도 부끄러워 할 것인가,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식육-식인의 모티프는 또한 매매와 결부되어 나타난다. 돈을 내는 자는 이웃의 살을 먹을 권리가 있다. 돈을 받는 자는 자기 살을 잘라 이웃을 먹여야 한다. 못 가진 자는 자신을 판매하여 가진 자의 밥상에 오른다.

작가의 출세작이라 할 <공룡 둘리>에서 둘리는 더 이상 소년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돈을 받고 팔려가 고기 덩어리가 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오른손 검지를 내밀어 ‘호이’를 외치지만 마법은 걸리지 않는다. 그의 오른손 검지는 프레스기에 절단된 지 오래. “이 민증(주민등록증)도 없는 새끼!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공장에서 쫓겨난 둘리의 모습은 이 사회 이주노동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멀지 않은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외계에서 온 둘리처럼 이방인일 따름이다. 그들의 잘려나간 손가락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있건, 슬쩍 부끄러워라도 해보건, 매일매일의 일상을 통해 우리는 소수자의 고기를 먹고 그들의 피를 마신다.

최규석은 이 무서운 현실을 탄탄한 그림 실력과 뛰어난 연출로 고발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 고발의 목소리가 떨리지도 우렁차지도 않다는 점이다. 노신은 피해망상광의 어조를 빌려 현실을 무시무시하게 그려내지만 최규석은 코믹한 터치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담담함이 때때로 섬뜩한 것이다.

<광인일기>는 1918년에 발표된 노신의 처녀작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 역시 최규석의 첫 작품집이다. 필자는 이 작가와 일면식도 없지만 이 책을 보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적으로 말하면 정말 기대가 되고 사적으로 말하면 정말 질투가 나는 신예이다.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다르지만 또 우리의 세계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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