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2호 영화
실패한 우화 ‘효자동 이발사’

이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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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천만시대를 열며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요즘,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브랜드는 ‘역사’다.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권 하에서는 기껏해야 조선왕조가 시대배경인 영화가 전부였지만, 최근의 경향은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춰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점도 발견되고 있다. 안이한 역사인식의 문제와 역사왜곡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효자동 이발사’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효자동 이발사’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암울하게 보여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던 한 인물을 통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우화적으로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장치를 통해 ‘성한모’의 일생과 역사의 순간들이 교차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1960-70년대의 무거운 시대공기를 한 소시민의 삶을 통해 정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인간’을 함께 이야기하는 한국영화 시대극의 새로운 시도인 ‘효자동 이발사’는 30여 년전, 폭압의 시대를 견??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시대, 우리 삶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한다.

- ‘효자동 이발사’ 홈페이지에서


위의 글처럼 이 영화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드러내기 보다는 주인공인 이발사 성한모의 눈에 비친 역사를 그리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한모의 아들인 성낙안의 눈에 비친 아버지와 6-70년대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를 끌고 가는 중요한 인물은 성한모이지만, 사건의 전후배경은 아들인 성낙안의 나레이션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국가권력에 대해 무조건적인 맹종을 보이는 아버지 세대와는 다르게 성낙안의 위치는 역사적인 사건을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국가권력의 피해자 - 고문후유증으로 걸을 수 없는 -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레이션 어디에도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 비난은 없다. 도리어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 - 우화적으로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 - 에서 벗어나 성낙안을 치료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언급은 피해가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 영화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사실이 아님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이 아니므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러저러한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미리 포석을 까는 것인지 명확치 않다. 영화의 시작에 ‘사실이 아니다’라는 자막만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심각한 역사왜곡은 박정희에 대한 것이다.

영화 ‘실미도’에서 처럼 이 영화 또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박정희가 아닌 비서실장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물론 박정희 개인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지만 박정희라는 인물은 단지 개인 박정희가 아니다. 개발독재와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국가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실임에도 이 영화는 슬쩍 피해버린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그리고 이 영화는 우화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역사를 보여준다고 하였지만, 도대체 무엇을 우화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우화인지, 아니면 60-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인지, 그것도 아니면 당시의 소시민적인 삶에 대한 것인지 작품이 전개되어 갈수록 방향을 잃고 있다.

결론적으로 ‘효자동 이발사’는 본인들이 이야기한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시대상황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박정희를 대표로 하는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해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은 지 이미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 뒤편에서 여전히 어슬렁거리고 있는 박정희라는 유령의 그림자를 느낀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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