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3호 장애없는
수화통역을 하는 사람들

김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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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일부터 6월 4일까지 뉴욕 유엔본부에서는 국제장애인권리조약 제정을 위한 제3차 특별위원회(AD Hoc Committee)가 열렸다.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의 정식 명칭(안)은 ‘장애인의 권리와 존엄을 위한 국제연합의 포괄적이고 완전한 국제조약’이다. 이 조약 제정의 노력은 2001년 빈센트 폭스(Vincent Fox) 멕시코 대통령이 발의하고, 같은 해 12월에 유엔총회에서 제안서가 채택되면서 시작됐다.

이번 회의에 세계적 장애인 비정부기구들를 포함하여 100여 명의 장애인 당사자들이 참여하여 조약 논의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로서 문제해결의 주체성과 위상을 확보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9개 장애인 단체에서 20여 명이 참여했다. 이러한 비정부기구의 참여와 발언의 기회들은 어떠한 국제조약도 제정 과정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 한다.

필자도 한국의 국제조약 추진연대의 초안위원으?참여하여 큰 경험을 했다. 이번 회의에서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은 다국적 비정부기구들 미팅에서 수화를 통역하는 장면이다. 또한 시각장애인들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안내견과 함께 유엔 본부 회의장을 드나들고, 개인컴퓨터를 이용하여 음성을 확인하며 기록을 하는 장면들이다.

매일 아침, 수시로 사안에 따라 열리는 비정부기구들 미팅에는 늘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을 등지고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인들의 미팅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첫걸음을 딛은 사람들은 언뜻 저항하는 방식으로 뒤돌아 앉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잠시 후면 사회자가 아닌 그들의 손에 시선을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 나라의 언어와 수화, 그렇게 각 국어는 2개의 언어로서 존재한다.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을 위한 2주간의 치열한 논의의 장이었던 유엔본부의 회의장은 그랬다.

수화통역에 힘입어 청각장애인들은 적극적으로 논의의 과정에 참여했다. 본 회의에서 개별 조항을 논의할 때 비정부기구들에게 주어진 발언 시간에 그들의 경험과 시각을 피력하거나, 비정부기구들 미팅에서도 매 순간의 내용을 놓치지 않았다. 멍하니 사람들의 입을 바라보고나 인지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소외나 의욕 상실로 회의 중간에 자리를 뜨는 경우는 없었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수화통역을 위해 참가한 사람들은 음성 동시통역과 수화 동시통역,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영어 중심적 국제회의가 다양한 사고와 입장을 배제할 수도 있지만, 영어가 이미 공용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경험은 경쟁력을 위해 비영어권에서는 수화 통역 또한 거시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는 청각장애인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영어 수화가 가능한 통역자를 찾기가 어렵고, 섭외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대안은 조속히 영어 수화 동시 통역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전문직업인으로서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계청각장애인연맹의 회장과 세계시각장애인연맹의 회장 모두가 여성이라는 것에 고무되기도 했거니와, 그들의 지적 활동의 능동성이 더욱 부러웠다.

인간의 가치나 우열이 정보 수집과 보유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사이버 시대인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러한 장애인들 삶의 이야기가 온라인에 집중되고 있는 정보인권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전히 오프라인에서도 소외와 배제를 낳고 있음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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