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3호 리눅스야놀자!
힙합과 리눅스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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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한 골목, 어두운 지하실 공간,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두 대의 턴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랩,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이것은 힙합하면 떠오르는 광경일 것이다. 80년대에 힙합은 미국의 어느 뒷골목 한 쪽 귀퉁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불과 몇 년 만에 빌보드 차트와 방송을 장악할 만큼 괴력을 발휘했다. 정규교육을 재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던 미국의 빈민촌 흑인들은 음악이나 악기를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한 그들이 가장 리듬감 있는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들은 악기나 오선지 없이 기존의 음악을 발췌하여 힙합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기법을 ‘샘플링(sampling)’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두장의 LP판을 동시에 틀면서 원하는 부분을 연결시켜(샘플링해서) 비트를 맞추며 즐겼고, 1980년대 중반에는 디지털 샘플러가 등장하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통 유명 힙합 음악은 수천 개의 소리를 샘플링하여 만들어진다. 물론 샘플링이 전부가 아니다. 주요 기술에는 턴테이블에 올린 LP판의 속도를 달리하는 디제잉(DJing), 컴퓨터의 전자 사운드를 음악적으로 배치하는 미디(MIDI) 등이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힙합을 작곡하는 사람을 작곡가라고 부르지 않고 ‘프로듀스’라고 부른다.

비극은 이들이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작됐다. 거의 모든 음악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들은 힙합 그룹들을 고용하였다. 이 때부터 저작권 소송분쟁이 시작됐는데, 유명한 힙합 그룹 드 라 소울(De La Soul)도 “You Showed me”의 밴드 Turtles와 법정싸움에 휘말려 17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저작권은 힙합 그룹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음악을 둘러싼 권리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이 있다. 저작재산권은 말 그대로 음악에 대한 소유권이고, 저작인접권은 음악 실연자, 음반을 제작자 혹은 방송사업자 등이 갖는 권리를 말한다.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음악을 모두 표절한 사람은 한 사람의 저작재산권만 침해한 것이다. 그러나 수천 곡을 샘플링해서 만든 힙합은 수천 명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을 모두 침해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힙합 그룹들이 선택할 길은 몇 가지 없는 듯하다. 음원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소유권이 없는 음악만으로 샘플링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힙합음악을 그만두어야 한다.

미국 흑인 민중들의 독특한 음악 생산 방식은 저작권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이끌고 있는 리차드 스톨만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은 마치 (저작권이라는)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힙합 뮤지션들도 같은 기분일 것이다. 힙합 음악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단지 스스로 즐기기 위해 기존의 음악을 샘플링해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누-리눅스(자유소프트웨어)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의 프로그램을 샘플링하며 새롭게 만든 소프트웨어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필요한 것(즐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산하는 것이다.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과 리눅스의 자유는 여기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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