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3호 영화
나를 안다고 얘기하는 너는 누구야?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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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마도 통신 시절이었을 것이다. 통신상의 채팅은 - 이것은 현재의 사이버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 대면에 의한 인간 관계와는 전혀 다른 새恝?관계 맺기의 방식을 제시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 어떻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는지에 대한 관찰은 나에게 있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되곤 했다. 어느 날 내가 입장하자 반가이 맞아 준 그 방의 채팅남녀들은 내게 자기소개를 청했고 나는 3초 가량 생각하다가 “올빼미”라고 쳐 넣었다.

난 그저 내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어떻게 되며 어디 살며 무슨 일을 하는가 그리고 결혼을 했나 등등의 정보로 나를 소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고, 오전에는 침구 속에 칩거하고 오후에는 슬슬 개운해지며 저녁부터 또랑한 내 생활 패턴이 올빼미스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새벽 시간에 채팅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라면 나와 비슷한 패턴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내 의도를 금방 이해할 것이라는 간단한 추측이 瀏린?대답하도록 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아, 군인이시군요. 휴가 나오셨나요?”

나는 1초쯤 멍해졌다가 족히 1분은 깔깔대고 웃었다. 그냥 가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네.” (아마 어떤 군부대 내 올빼미라는 암호가 있나보지?) “저는 지난달에 제대했어요. 반갑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그냥 존칭을 쓰도록 하죠. 어쩌구저쩌구 쉴 새 없이,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 틈도 없이 한동안 부대 얘기를 줄줄...” 지난달에 제대한 그가 ‘군복무 중인 척하는 나’에 대한 반가움과 군부대에서의 소소한 추억거리들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군인인 척 구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군인인 척 하는 나는 군대에 대한 아무런 체험도 기억도 없기 때문이고, 군대와 관련한 일말의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군대가 원천적으로 면제된 자의 처지에서 얻은 한정적인 것이므로 군대에 가야 하는 처지와는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군인이라는 정체성은 체험에 바탕한 기억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용변이 급한 것처럼 서둘러 그 채팅방을 빠져나왔다.

혹자는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을 할 때는 사람을 진실에 의거해서 대하지 않고 거짓말과 자기를 포장하는 말과 남을 현혹하는 말로 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잘 알기 어렵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곳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은 아이디와 (혹은 아바타를 포함하여) 내가 제시하는 정보들이다. 내가 “올빼미”라고 제시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정보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여 반응하느냐에 따라 나는 각각에게 다른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지식과 선체험이 개입된다. 그가 군대 물이 아직 선명하게 배어 있는, 바로 한 달 전에 제대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부대 내에서 사용하던 암호에 그렇게 재빨리 반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다른 가능성의 여지도 고려하지 않고 대번에 나를 군인으로 자신 있게 추정할 수 있었을까? 내가 군인인 척 할 수 있었던 것, 아니 정확히는 척 해보려고 순간적으로 시도했었던 것은 내가 그러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보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때 사이버상에서 관계 맺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내가 제시하는 정보를 조작할 가능성, 그리고 그 정보를 ‘지 맘대로’ 받아들여 나를 판단할 가능성.

흔히 사람들은 사이버상에서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여러 요소들을 교란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이것은 ‘조작’과 관련된다. 나는 온라인에서 골 빈 근육맨이 될 수도 있고 영리한 초등학생도 될 수 있고 돈 많은 실버도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의 여고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조작해 내는 일방향성 정체성의 측면(도 물론 사이버스페이스의 새로운 차원과 무한한 가능성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정보를 해독하는 과정을 포함한 쌍방향적 정체성 형성 과정에 주목하고 싶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빨간 레이스 같은 요란한 드레스를 입고 파란 머리를 풀어헤친 채 오른팔의 불뚝한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아바타를 만들었다. 진지한 대화 상대를 찾는 외로운 독신 남자는 내가 헬스를 즐기는지 탱고를 즐기는지 머리 색깔을 되도록 튀게 하고 싶은지 등 취미와 취향에 대한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주로 있는 만화 카페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의 조합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십 년 지기 친구들끼리 만든 커뮤니티에서는 이 아바타가 이렇게 읽힐 수 있다. 이렇게 정신 사납고 분열적인 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 그냥 그럴 뿐인 아이, 게을러서 운동은 안하고 또한 게을러서 춤을 배울 생각도 없고 또한 게을러서 머리색깔은 천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만화는 너무 많이 봐서 사실 뭐를 봤는지 기억도 못하는, 그냥 그럴 뿐인 아이. 그런데 이 친구들은 내가 <툼 레이더>의 라라처럼 되?싶어서 헬스를 시작하고 친구의 꾐에 빠져 탱고를 추러 다니게 된 현재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서설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이번에 다룰 영화는 <후아유>다. 지면 관계상 본론이 극히 짧아져야겠다. 이 영화는 ‘영화 속 사이버 세상’이라는 테마에 더도 덜도 없이 딱 들어맞는 영화다. “후아유”라는 컴퓨터 게임을 개발한 남자와 그 게임을 하는 여자가 온-오프에서 서로 다른 사람으로 만난다(고 여자는 알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별이와 멜로라는 이름으로 만나서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호수를 만들어 선물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몇 년 동안 자폐적이 되어야 했던 사연을 얘기한다. PC 통신과 호출기와 폴라로이드 세대에 대한 문화기술지로 읽어도 손색없었던 <접속>과는 달리, 사이버 공간에서의 상호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일상의 상당 부분을 사이버 공간에서 보내고 있는 세대에 대한 시대적 인류학 보고서가 될 뻔도 했을 이 영화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신선할 것도 없는 설정 하나만 남은 채 시대성을 오히려 탈색시키고 있다. 디카 세대에 대한 묘사가 일회적인 스케치로 배치된 것이나 두 남녀가 사이버 공간에서 대화했던 상대가 결국 누구인가를 명확히 밝히면서 “현실 세계가 더 좋다”고 결론짓는 것으로써 해피엔드를 만든 것이나,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체성과 관계 맺기라는 주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가상의 두 축을 진실과 허위의 두 축과 정확히 병치시키고 있는 것이며, 사이버 공간을 누비며 새로운 왕국과 새로운 인류들을 창조해내고 있는 세대의 관념에서 퇴보하고 있는 노파심이다. 나를 안다고 얘기하는 넌 누구야? 컴퓨터 밖으로 나오라고 안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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