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3호 북마크
정보과학은 위생학인가?
<인터넷 숭배>, 필립 브르통, 울력, 2004

박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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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욕심쟁이 소녀가 하나의 케이크를 나누어 갖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뭘까? 제3자가 케익을 절반으로 갈라 두 소녀에게 나누어주면 될까? 그런데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똑같은 크기로 나누어주더라도 서로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정답은 한 소녀에게 케익을 자르게 하고 다른 한 소녀에게는 두 조각 중 맘에 드는 조각을 먼저 고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두 소녀가 아무리 탐욕스럽더라도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제임스 해링턴의 오시아나 공화국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바로 이 논리에 의해 근대 정치제도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등장한다.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는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그 소녀들의 탐욕을 줄일 가능성은 애초에 포기해버린 시스템이라는 점이다(<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경제제도의 기본 원리인 시장 경쟁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라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의 기저에는 이처럼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정보사회를 바라보는 필립 브르통의 시각 역시 이 점에 집중하고 있다. 브르통이 파악하기에 정보사회의 이상은 완전한 투명 사회이다. 1940년대 사이버네틱스의 출현 이래로 정보과학이 공유해온 이상적 세계는 서로의 정보를 완벽하게 공유함으로써, 완전한 집단 지성을 이루는 평화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따져 보면 근대적 이상 세계를 꿈꾸던 이들은 대개 그러했다. 자유시장론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했?때, 그들이 전제하고 있던 것은 완벽하게 정보가 공유된 상태였다. 칠레 아옌데 정부가 추진했던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도 그러했다(김해민, “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노동자의 힘> 제39호). 레닌이 사회주의는 전화(電化, electrificiation)라고 했을 때도 이런 이상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완벽한 정보 공유를 왜곡하는 것은 바로 불투명성(주로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에서 기인한다)과 폭력(권력과 법, 그리고 브르통이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본도 그 폭력의 일부일 것이다)이다. 브르통이 보기에 정보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면 접촉의 소멸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20년 전부터 미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위생학’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떤 것이 호전적인 병원균의 매개자라면 그것을 다른 사람과 격리시켜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나 그들과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 필요성은 악과 폭력을 부추기지 않겠는가?” 9·11 테러 이후 우리가 살아온 세계를 되짚어보게 하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정보화 비관론자들은 낙관론자들이 원하는 세계가 불가능하고 틀렸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그러나 브르통은 낙관론자들이 약속한 이상 세계 그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비관론자라고 할 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글 곳곳에서 근대 기독교의 세계관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바벨탑에 비유하는 대목이나 초기 해커들의 반문화적 전통 중 뉴에이지 문화나 선불교적 전통을 강조하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 전자주민카드 반대 투쟁에 기독교 단체들이 적극 결합했던 것처럼, 최근 번역된 프랑크 준의 <인터넷의 배후에 악마의 숫자 666이 있다>도 성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면서 감시사회로서의 정보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정보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두려움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정보과학의 논리를 확인하기 위해 브르통은 정보화 이론가들 뿐 아니라,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한 SF 소설들, 스티브 잡스 같은 정보기술의 대가들의 전기까지 포함해 100여 명에 달하는 대가들의 저술을 검토하고, 그들의 논리에 대해 수많은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워낙 많은 대가들을 등장시키다보니 다소 독서노트 같은 느낌도 주는 책이다. 그 덕분에, 거의 미국의 이론가들만이 소개되는 우리 학술·출판 문화에서 접하기 어려운 프랑스 이론가들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들려주는 덕목도 가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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