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표지이야기 [사 회 단 체 정 보 통 신 정 책 들 여 다 보 기]
자유의 원칙, 통제의 욕구
게시판 운영원칙, 공동체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돼야...

오병일  
조회수: 4790 / 추천: 54
적들의 글은 삭제한다.’ 과거에 모 노동조합 사이트에 적혀있던 게시판 운영원칙이다. 이 문구는 게시판 운영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노동조합의 파업 시 회사측은 노동조합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해 게시판의 여론을 조작하기도 한다. 노동조합은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를 막기 위해 게시판을 검열하게 된다. 하지만 게시판 상의 글이 ‘적들의 글’인지, 노동조합에 비판적인 일반인의 글인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적들의 글은 삭제한다!?

어느 홈페이지나 자유 게시판을 두는 것은 국내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점이다. 그런데 일반 시민이나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개설했던 자유게시판에 단체나 대표자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해당 단체의 게시판은 몸살을 겪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표현의 자유를 ‘요구’했던 단체들이 이제 표현을 ‘규제’하는 위치에 처한 셈이다. 지난 2000년 11월 ‘노동미디어 2000’ 행사에서 개최된 ‘사회운동단체, 홈페이지 운영원칙 어떠해야 하는가?’ 워크샵에서는 이런 고민이 토론됐다. 워크샵에서 제안된 해법은 홈페이지 운영자의 자의적 규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네티즌과 공유하는 ‘게시판 운영원칙’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민주노총 게시판에는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내부 정파간의 논쟁까지 매일 수십, 수백 개의 게시물이 올라온다. 민주노총은 지난 1999년에 게시판 운영규정을 만들었는데,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사상·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 최세진씨는 “상업적 광고를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게시물을 삭제한 적이 없다”며, “만일 운영원칙이 없었다면 많은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시판 상에서 민감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게시물 삭제나 게시판 폐쇄 요구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운영원칙을 근거로 이런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의 운영 경험을 토대로 사회적 소수자의 보호나 명백한 명예훼손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규정을 개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운영원칙이 있다고 문제가 간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최세진씨는 “파업시기에 투쟁을 파괴하기 위한 악선전이 올라올 때는 여전히 고민”이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원칙 몇 개로 해결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노조가 회사와 타협했다던가, 노조 위원장에 대한 악의적 유언비어는 파업 상황에서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역시 고민이 많다. 여성단체의 홈페이지는 군 가산점 논란과 같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사이버 상의 마초들에 의해 초토화되곤 했다. 여성단체연합의 이선영씨는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네티즌의 자정작용을 믿고 싶다”면서, “하지만 폭력성 발언이나 혐오적 글에 대해서는 내부 논의를 거쳐 삭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게시판이 마초들에게 장악되어 정작 여성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에 의한 통제, 인증게시판

자유게시판과 함께, 점차 인증게시판을 병행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인증을 필요로 하는 회원 전용 게시판은 상호 신뢰있는 사람 사이에 영양가 있는 토론이 가능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특히, 방문자수가 많은 사이트일수록 게시판의 목적과 성격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인증게시판이 반드시 실명 게시판인 것은 아니다. 상업적 회사와 달리 실명 확인의 수단이 없거나 번거롭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2003년 초 정보통신부의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반대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이에 대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거부감은 매우 큰 상황이다. 하지만 인증게시판을 사용함으로써 게시판이 오히려 죽어버릴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노동네트워크 이용근 사무국장은 “노동조합의 인증 게시판은 거의 죽어있는 상태”라고 지적한다. 특히, 단위 노조의 경우 인증게시판은 실명제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관리자가 글쓴이의 IP 주소를 볼 수 있는 기능도 실명제와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자체 제작한 게시판의 경우, 글쓴이의 IP 주소를 남길 것인지를 관리자가 선택하도록 하고 있지만, IP 주소를 남길 경우에는 반드시 글쓴이에게 이를 공지하도록 되어 있다.

사회에서 허용되는 표현의 한계는 각 사회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달라졌다. 한 사회 내에서도 공동체마다 다를 것이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정확한 선을 긋기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게시판 운영원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성원의 합의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총 최세진씨는 내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게시판 운영원칙을 만들 때, 단체의 의결권자가 그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나중에 문제가 되면 스스로 규정을 파기하게 되거나 엉뚱하게 해석하게 된다. 게시판 운영원칙은 기술적인 판단이 아니라, 단체 내부 소통을 통해 정책으로 결정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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