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과학에세이
비정규직 연구원의 편지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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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게시판에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어느 연구소의 비정규직 연구원이라고 했고, 불똥이 튈까봐 어느 연구실인지는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주 5일제를 시행하는데 팀장이 토요일에 쉬지 말고 나오라고 강요합니다. 격주 쉬는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이라서 그런가요... 만일 안나오면 본인이 직접 관리하겠다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늦은 야간까지 일하고 이젠 개인의 사생활 시간도 강제로 뺏어 가는데... 도와 주세요.” 이것이 편지의 대강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비정규직의 문제는 최근의 일시적인 현상이 결코 아니다. 출연연구기관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기 시작한 87년 이후 수년간 각 노동조합들은 전일제, 위촉직, 촉탁직, 계약직 등 다양한 이름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비정규직들을 노동조합에 가입시키고 처우를 개선하는 한편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하는데 역점을 두었고, 그것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출연연구기관의 공공·공익적 연구기능보다 산업경쟁력 강화가 더 우선이라는 경쟁의 논리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로 사용자들은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러 형태의 비정규직들을 양산했다. 비상근, 시간제, 도급, 용역, 인턴, 연수생, 연구생, Post-Doc(박사 후 연수연구원), 석사 후 연수연구원 등, 출연연구기관의 비정규직들은 그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천차만별의 노동조건 아래 형편없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숫자도 전체 인력의 50%를 웃돌고 있다.

지난 봄에 출연연구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395명의 비정규직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이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나이(23-29세 42.8%, 30-34세 45.8%, 35세 이상 8.9%)와 학력(학부 졸업 28.6%, 석사 졸업 38.7%, 박사 졸업 7.1%)이 여느 젊은 정규직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도, 임금은 학력과 근무형태별로 큰 차이를 보여(석사과정 75만원, 박사과정 109.1만원, 석사졸업 157.2만원, 박사졸업 179.6만원, 학연과정 69.5만원, 연수생은 76.5만원) 전체 평균 128만원에 불과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해마다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화, 그리고 비정규직 채용을 엄격하게 제한할 것을 단체교섭의 주요 요구사항에 포함하고 있고 비정규직까지 조직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노동조합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출연연구기관의 실태가 이러하니, 명색이 노동조합 간부로서 앞서 소개한 류의 편지나 호소를 접할 때마다 참담한 심경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른다. 이미 늦은 지도 모르지만, 기득권의 벽에 갇힌 정규직 노동조합의 한계를 뛰어넘을 어떤 결단과 투쟁이 없으면 노동자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조차 덧없이 사라질 듯하여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한 날들이다. 열대야만 고통은 아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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