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영화
완벽한, 너무도 완벽한... 자본의 세계에서 ‘나는 진짜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감독 : 사토시 콘 출연 : 이와오 준코, 마츠모토 리카, 츠지 신파치 1997년

공미연  
조회수: 3541 / 추천: 55
언젠가 사무실로 일본에서 온 우편물이 도착했다. 우편물에는 누가 보냈는지 알 수는 없고 다만 일본잡지 한 권이 들어있었는데 컬러로 인쇄된 부분은 대부분 앳된 소녀들이 속옷을 약간 걸친 누드 사진이 다량 실려 있어서 이런 잡지가 왜 사무실로 배달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 사람들 모르게 누군가 ‘이런 잡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봤다. 하지만 며칠 후 그 의문은 풀렸는데, 잡지 속 한 페이지에 서울영상집단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연관 있는 기사가 실려있었고 그것을 취재했던 기자가 그 잡지를 보내준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외국의 대부분의 시사잡지들이 여성의 누드 사진을 기본으로 싣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야 팔린다나 어쩐다나, 원... 일본에 촬영갔을 때 다시 한번 확인해 본 결과 서점엔 ‘이런 잡지’들이 즐비했고, ‘이런 잡지’가 일반적인 잡지의 형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아주 오래 전엔(불과 몇 년 전이지만) 여배우가 누드를 찍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누드를 찍는다고 해도 사회적 물의는 고사하고 돈이 꼬리를 물고 다닐 것이다. 누드가 거대한 자본과 만나 돈을 낳는 황금거위가 되면서 그 사회적 비난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 옛날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장본인들도,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물의’를 일으켰던 많은 분들도 다시 한번 한국사회에서 좌절할만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바일서비스’를 통해 은밀하게 간직하던 누드를, 진정한 보수임을 자처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또는 진보를 자처하는 지면에서 ‘완벽한 컬러’로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정체성도 지금같이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란을 겪다가 급기야 스스로 몸을 던져 ‘변신’에 성공하기도 하니 말이다. 여기 그 변신에 도전하는 아이돌스타가 있다.

<퍼펙트 블루>의 주인공 ‘미마’는 ‘참’이라는 3인조 그룹의 아이돌 스타. 그러나 미마의 소속사에서는 음반판매가 별 볼일 없자, 돈이 되는 배우로 전업하게 한다. 고별 공연을 마친 후 미마는 팬이 보낸 편지를 통해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를 알게되고 메니저 루미의 도움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된다. 배우로 출연하게 된 드라마 <더블 바운드>에서 미마가 맡은 건 “당신은 누구죠”라는 대사 한마디. 카메라가 돌아가면 금새 극중 배역으로 돌아가는 선배 연기자를 보며 자신도 성숙한 배우가 되길 꿈꾼다. 하지만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하다. 미마에게 주어진 건 섹스 코드 뿐. 드라마에서 강간당하는 소녀를 연기해야하고 누드사진도 촬영해야한다. 마음속으로 성숙한 연기자라면 이쯤은 해내야 한다고 자기최면을 걸지만 급격한 변화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여기에 미마의 열혈팬이자 스토커가 등장하고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엔 자신의 하루 하루가 너무나 상세히 기록되며 자신의 혼란스런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런 와중에 미마와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 살해되고 미마 앞에 아이돌 시절의 미마가 환상처럼 나타난다. <더블 바운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소녀 역을 하고 있는 미마는 드라마와 현실의 환상이 뒤엉키며 혼란을 겪게 된다. 이 혼란은 비단 영화 속 미마 혼자만 겪는 것은 아니다.

“★★★☆(7점) 저는 내용을 이해 못하겠어요;; - kiri0519” 한 네트즌이 <퍼펙트 블루>를 보고 쓴 20자 평이다. 그래도 10점 만점 별점에 7점을 준걸 보면 무슨 내용인진 몰라도 충격파를 받은 점수를 준 모양이다. 현실과 환상 그리고 영화 속 드라마와 꿈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 어떤 것이 영화 속에서 내가 믿고 있는 진짜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아니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해도 점점 미마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 뿐 영화 속 현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이 영화의 복잡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일 것이다. 결국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진짜와 가짜 역시 구분할 수 없다. <퍼펙트 블루>는 1997년에 제작됐지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2004년에야 국내에서 개봉했다. 당시는 더욱 충격적인 영화였다고 하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충격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다중 인격, 도플갱어, 연예산업, 살인 사건 미스테리까지 촘촘히 엮여있다. 특히 97년 인터넷이 대중화에 들어설 무렵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가 심심치 않게 논의되던 때 ‘홈피’의 ‘활약’을 예고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영화 속 미마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게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 목소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홈페이지를 통해 드러난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가상현실이 결국 현실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나도 내가 누군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웹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할 때 직업을 묻는 난이 있다. 예술인에 동그라밀 칠까, 백수에 동그라밀 칠까, 그냥 기타인가,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 아, 왜 이런걸 만들어서 가입 필수 사항이라 우기는 걸까. 근데 요 며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일명 ‘오아시스프로젝트’라는 ‘분양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인데, 예술가들이 작업실이 없어(사실 돈이 없어 작업실을 구하지 못한 것이지) 작업실을 구하러 다른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안타까운 ‘현실’에 작업실을 무료로 분양한다는 거다. 그들이 로또에 당첨되서 자선사업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5년째 공사가 중단된 채 빈집으로 남아 있는 목동 예술인회관을 분양하겠단다. 분양이라는 말보단 ‘불법점거’라는 표현이 맞겠다. 예술인회관은 예술인들에게 활용되어 건물의 본뜻을 살리게 되고 예술인들은 무료로 작업실을 분양받아 예술인으로서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나만, 이들도 갈 길은 멀다. 비리와 특혜 의혹으로 예술인회관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를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정부가 오아시스프로젝트의 분양사업에 손을 들어 줄지는 미지수다. 8월 중순에 ‘점거’에 들어간다고 하니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을 지켜볼 일이다.
‘아! 나도 더 이상 사무실 월세 걱정 안하고 살고 싶다. 그래서 당당하게 직업란에 예술가라고 동그라미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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