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5호 북마크
‘더 많은 시간으로의 무한 경쟁’
<24시간 사회>, 레온 크라이츠먼, 한상진 옮김, 민음사, 2002

박준우  
조회수: 3110 / 추천: 53
흔히들 정보 사회가 발전하면서 정보통신 기술을 사용하는 능력(literacy)이나 정보통신 기술을 자기 삶에 적용·활용하는 능력(application)에서의 격차는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지만, 물리적인 정보 격차의 문제는 점차 해소된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 필자가 보기에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물리적 격차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의 격차 문제이다. 상식적으로도 생산직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 사이에는 정보접근 시간에 있어 엄청난 격차가 발생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시간상의 격차가 마치 자본주의 초기의 원시적 축적과 비슷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실증적 근거도 없는 얘기를 굳이 끄집어낸 것은 ‘정보 격차’를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사실 ‘사이버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정보통신 기술은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하지만 시간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 운용을 좀 더 자유롭고 편리하게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지구의 자전 주기와 생명의 유한성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때문에 필자는 시간을 둘러싼 갈등이 21세기 사회의 핵심적 갈등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다.

레온 크라이츠먼의 <24시간 사회>는 바로 이 ‘시간이 부족한 사회’라는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이다. 그가 추구하는 24시간 사회는 한 마디로 모든 서비스를 24시간 내내 이용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당연히 24시간 사회는 24시간 내내 노동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이 사회에서는 노동의 기회도 증가하며, 하루 중 언제 노동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도 더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밤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들 아닌가? 백인들에게는 개척이었지만 인디언이나 제3세계 원주민들에게는 약탈과 파괴, 식민화였듯이, 시간을 개척하는 것은 아직 자본의 손에 들어오지 못한 시간, 즉 재생산의 시간을 식민화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저자가 제시한 대안 또한 우리에게는 결코 즐거운 상상일 수 없는 ‘변형시간근로’의 일반화인 것 아닌가?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저자를 단순히 더 많은 시간을 식민화하는 데 몰두하는 신식민주의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다소 가혹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저자는 시간 개척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전가하지 않는다. 개인들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저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보장, 시간 통제의 분권화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변형근로시간제’만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의식에 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저자의 패배주의에서 기인한다. 그는 소비 사회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린다. 소비 사회가 성립된 역사적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했을 뿐, 소비 사회로의 경향이 역전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24시간 사회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을 지고 있는 현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의 부담을 나누지 않는 남성들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한 채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귀농 운동, 생명 운동, 공동체 운동 등 자신들의 몸으로 대안을 일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많은 한계에도 여러 모로 읽어볼 대목이 많은 부분이다. 특히 제11장 「24시간 도시」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한계 모두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이다. 요즘 유행하는 개념들인 ‘생태’와 ‘활력’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필자의 고민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장이었다. 저자의 직업이 컨설턴트라서 그런지, 개인 차원에서 24시간 사회에 적응하는 법, 특히 변형시간 근로에 개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다양한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스스로 들쭉날쭉한 근로시간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회단체 활동가들, IT 분야 노동자들에게 작지만 긴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더 많은 시간으로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정보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혹은 도시의 활력을 찾기 위해, 호르몬 조절 약물이나 한 지역을 통째로 유리로 덮는 계획까지도 긍정적 시선을 보내는 저자의 욕망과 신체의 식민화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그래서 요즘 필자는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에 매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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