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6호 사이방가르드
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 프랭크 무어

이광석  
조회수: 3961 / 추천: 53
돈가방을 챙겨 달아나는 흰 가운의 생명공학자, 그를 따르는 거대한 흰쥐들, 잘려나간 손, 이름 모를 수많은 약품 더미와 무덤들, 그 위를 나뒹구는 실험용 장비들, 누런 돈더미 아래 깔린 희생자들의 피, 생체 실험에 희생당한 환자들과 해골... 이 무시무시한 생명공학의 미래상의 제목은 이름하여 <위저드>(1994)다. 1500년경 히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정원>에 비견할 만하다. 현대 의학의 묵시론을 이렇듯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름은 프랭크 무어다.

그는 근 20여년간 현대인간의 생물학적 부산물인 에이즈의 고통 속에서 살다 얼마 전에 작고했다. 에이즈에 걸려 48살의 나이에 스러질 때까지, 그는 몸소 현대 생명과학과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단체 ‘엑트업’ 산하 ‘비주얼 액트’의 초창기 맴버이기도 했다.

예술분야에서 생명공학은 그리 간단치도, 구미가 별로 당기지도 않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한때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기술적 세례와 더불어 디지털 혹은 넷 아트의 붐이 일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현실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무어와 비슷한 초현실주의 계열의 최근 주목할 성과라 하면, 알렉시스 로크만의 <농장>(2000)이나 에바 서튼의 <하이브리즈>(2000), 토마스 그런펠드의 <오誤결합>(1994)과 같은 작품들을 꼽을 수 있겠으나, 생명공학과 예술은 여전히 뭔가 낯선 관계임이 현실이다.

무어는 현대 질병의 고통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스스로의 비관적 모습에 갇히기보다 그 고통을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을 통해 현대의학과 공학의 살벌함을 얘기하듯 화폭에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마도 이는 그의 유년시절 공상과학SF 소설을 즐기고 생명공학에 관심을 갖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데뷔작이자 생명공학의 문제를 담은 <유전자변형식품(GMO)>을 내놓자마자 그만 에이즈에 걸린다. 우연치곤 너무나 기구한 삶의 여정이다.

그는 이윽고 유전자 구조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제레미 리프킨 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그만의 비판적 사회공학 접근을 키운다. 이 시기에 확고하게 자본과 생명공학/환경파괴의 불가분의 공생 관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그가 생산한 미술 작품들은 뭐뭐 ‘-연구’란 제목과 함께 그가 고민하는 자본과 생명공학, 환경, 인간의 관계들이 무슨 도식처럼 표현돼 있다. 특히, 그가 지닌 의료약품의 다국적자본에 대한 분노는 후반기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저드>나 <오즈>(2000)를 보면 항상 누런 황금색 돈더미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피의 대가 위에 올라선다. 특히 <오즈>에선 자본의 돈더미 위로 유전자 변형의 거대한 식물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2여년 간의 그림들은 90년대 초엽의 활동 작품에 비해 사회 인식의 통찰력을 보다 잘 반영한다. 당시 어느 작품 활동 시기보다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는데,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다가올 생명공학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담고 있다. 이는 소위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표현하는 미래상의 표현 방식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의 진지함을 보여준다. 소위 ‘매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장르는 예술 기법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어도, 보여주는 의미의 맥락은 관람자로 하여금 너무나도 현실주의적인 진지함을 공감하게 만드는데 그 성과가 있다.

2002년 4월 그가 작고하기 전 대담에서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쁜 환경에서 인간이 건강할 수 없듯, 탐욕과 착취의 나쁜 인간들이 판치는 곳에서 좋은 환경은 없다.” 이렇듯 그의 가치는 자본-생명과학의 불순한 동맹을 붓의 힘으로 강렬하게 전달할 줄 아는 힘에 있다. 작가는 이미 저 세상에 있지만, 작품들이 가질 의미의 생명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질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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