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6호 북마크
‘속도’로의 무한 경쟁이 없는 세계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04

박준우  
조회수: 3563 / 추천: 63
“운동가들이란 몸을 던져서 속도를 늦추는 사람들이다.” 필자가 몸담은 단체에서도 특히나 존경하는 한 선배로부터 몇 년 전에 들은 말이다. 한 편으로는 시지프스처럼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운동가라는 사람들을 그만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현 그대로의 삶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쳐 총 141일. 지율 스님은 천성산의 뭇 생명들을 위해 목숨을 건 단식으로 KTX의 질주를 저지했다. 수경 스님을 비롯한 네 분의 성직자들은 자동차로 세 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65일에 걸쳐 12만 번 절하고 36만 번 걸음으로써, 수 억 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살아온 새만금의 생명들의 삶을 재현했다. 그 장엄한 느림조차도 부족했을까? 수경 스님은 도법 스님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생명과 평화를 탁발하겠다고 아예 3년의 탁발 수행에 나섰다. 클릭 한번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말이다.

폴 비릴리오가 <속도와 정치>에서 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로 제시한 것도 바로 ‘과속’의 문제다. 그가 창안한 ‘drmologie(흔히 속도학으로, 이 책에서는 질주학으로 번역되는)’라는 개념이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기술로 인해 적어도 지구상에서 ‘공간’ ‘지리’라는 개념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대에서, 권력의 소재는 이제 시간상의 우위, 즉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도를 향한 무한 경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첩보 기술의 발전에 의해 더 이상 은폐할 곳이 없어진 채, 오로지 상대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승리의 관건으로 삼게 된 전쟁의 발전사를 통해, 파시즘 시대의 독일과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그는 이 시대를 실감나게 확인시켜 준다.

이 책 외에도 국내에 번역된 비릴리오의 저작으로 <전쟁과 영화>(권혜원 옮김, 한나래, 2004)와 <정보과학의 폭탄>(배영달 옮김, 울력, 2002)이 있다. 세 권 모두 각종 개념의 향연에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역사들, 사례들을 늘어놓아 읽기에 만만치 않지만, 꼼꼼히 읽어볼 만한 책들이다. <전쟁과 영화>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정보통신 기술의 또다른 욕망,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역시 전쟁의 발전사와 연결시켜 추적한다. <정보과학의 폭탄>은 정보통신혁명에 대한 그의 분노가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과잉된 탓에 다소 읽기 거북하기도 하지만, 고민을 던져주는 많은 사례들을 담고 있다. 예컨대 필자가 메일 계정으로 사용하고 있는 에스키모 소년 미닉(Minik)의 이야기 : “내 아버지의 몸을 돌려주세요!” 이것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진열장에 전시된 해골이 자신의 아버지 퀴숙의 것이었음을 발견한 이누이트족 어린 소년의 탄원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릴리오는 주로 들뢰즈와 관련지어져 소개되고 논의되어 왔다. 이 책을 옮긴 이 역시 그러하다. 물론 비릴리오도 68혁명이 낳은 사상가 중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맑스주의나 정신분석학 등의 유물론적 전통에 기반한 여타의 포스트 이론과 분명히 구분된다. 편재성과 동시성 그리고 즉각성이라는 현대 과학기술의 지향이 곧 신의 특성임을 지적하는 그는, 지난 번에 소개한 <인터넷 숭배>의 필립 브르통과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전통에 발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속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현대 자본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혁명조차도 자기 땅에서 쫓겨난 프롤레타리아트의 질주 본능을 최대한 끌어낸 것으로 이해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속도를 식민화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와 별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코뮌조차도 말이다 : 이 ‘노동자 군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구호도 “우리는 계속 여기 있겠다!” 즉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였다. 들뢰즈·가따리는 그가 유목적, 혹은 혁명적 속도를 전쟁의 속도나 관리의 속도와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속도에 대한 고민은 부르주아 정치나 사회주의 정치와 구분되는 초록정치의 독자적 문제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대안이다. 비릴리오는 (이 책에서는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지만, 이후 저작들에서) 저항에 관해서는 잠정적으로나마 ‘picnolepsie’ 즉 ‘중단, 혹은 방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항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법. 물적 토대를 고민해온 사회주의 정치학이 사유재산 없는 세계를 그려냈다면, 속도를 고민해온 비릴리오가 그려낼 수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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