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6호 만화뒤집기
돼지들의 대한민국
앤서니 브라운의 일러스트레이션 <돼지책>과 반쪽이 아저씨의 고백

김태권  
조회수: 2935 / 추천: 49
옛날 어떤 광고. 남편이 주방일 하는 부인에게 당부하기를, “여보, 옆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도 음식 좀 해다 드리지.” 그러자 부인이 감격하여 답한다, “당신의 그런 마음씀에 반했다니까요.” 둘 다 행복하게 웃는다. 그리고 올라오는 상품 사진(어떤 식용유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부인이 이렇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야! 기특한 마음씀인걸? 말만하지 말고 네가 하렴.” 대한민국의 남편은 그래도 웃을 수 있을까?

<돼지책>은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다. 작가는 이전에 <미술관에 간 윌리>라는 그림책으로 재주와 재치를 뽐낸 바 있다. ‘윌리’는 침팬지인데, 이 침팬지가 간 미술관에는 세계의 명화들이 침팬지의 관점에 맞추어 패러디돼 있다. 조개껍질 속에서 솟아 올라온 것은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아니라 침팬지이다. 그랑자트 섬에서 일요일을 즐기고 있는 것도 ‘쇠라’의 동료 시민들이 아니라 침팬지들이다. 꼼꼼한 그림 실력으로 곳곳에 원숭이들을 숨겨놓았다. 가히 ‘숨은 원숭이 찾기’라 할만하다.

<돼지책>에서 작가의 재치는 무거운 주제를 잘 살리고 있다. 작가는 원숭이를 숨겨놓듯 돼지를 숨겼다. 그러나 이 ‘숨은 돼지 찾기’는 단지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필자를 비롯한 남성들, 대한민국의 돼지들에게 부끄러움을 준다. ‘너무너무 중요한 회사’에 다녀오고 ‘너무너무 중요한 학교’에 다녀오느라, 엄마의 얼굴조차 거들떠보지 않고 꽥꽥 큰 소리만 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은,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에 의해 현실과의 대면으로 내던져진다. “너희들은 돼지야!” 이들이 대면한 현실은 냉엄하다. 누군가 가사 노동을 하지 않으면, 집안은 가사 상태에 빠진다.

남자들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이 현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자세히 밝히면 이 좋은 책의 내용을 스포일하는 것이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은 직접 읽어보길. 다만 여기서 드는 생각은, 그럼 전에는 남자들이 그 사실을 몰랐느냐는 것이다. 혹시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 닦아야만 그릇과 방이 깨끗해지고, 누군가 장을 봐야만 냉장고가 텅텅 비지 않으며, 누군가 빨래를 해야만 입을 옷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 옆집 할머니에게 가져갈 음식을 만들어야, 남편 자신이 생색을 낼 수 있다. 이 간단한 걸 정말 몰랐을까?

반쪽이 아저씨는 평등부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대한민국 돼지들의 배신자이다. 어릴 때부터 돼지로 성장하고 돼지가 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돼지의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럼 그의 만화는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선언적 내용으로 가득 차있을까? 웬걸, 그 만화의 절반 가량은 가사일에 관한 것이다.

반쪽이 만화 가운데 가장 뜨끔했던 것은 이런 만화였다. 남자들은 아내가 없을 땐 방안을 번쩍번쩍 치워놓고 산다. 그러나 막상 부인이 있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지르기만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가사노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할 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누군가 해줄 사람이 있다면, 즉 여성이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돼지들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