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7호 북마크
노동, 하루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
<시계 밖의 시간> 제이 그리피스, 박은주 옮김, 당대, 2002

박준우  
조회수: 3758 / 추천: 54
미디어참세상> 고정칼럼 중 ‘장귀연의 세상뒤집기’라는 코너가 있다. 최근 그 코너에 <잡담 혹은 몽상>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노동운동이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더 많이!’가 아니라 ‘더 평등하게! 더 적게!’여야 한다는 그의 고민은,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는 “어디 가서 진지하게 할 건 아닌” 이야기, “잡담이니까 하는 몽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돌아와서 칼럼을 쓸 때 지구는 다시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상상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정세’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상력은 항상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대 공식적인 의견으로는 말하지 않는, ‘잡담이니까 하는 몽상’이 필자에게도 하나 있다. 만연한 실업과 날로 증가하는 노동강도, 고용에서의 남녀 차별, 부모의 보살핌 없이 자라는 아이들, 10억이 넘는 절대빈곤 인구와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리고도 남는 음식 쓰레기, 하루하루 고갈되어 가는 지구...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20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는 몽상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몽상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몽상인 것만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토착민들은 하루에 네 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버틀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시계 밖의 시간>(제이 그리피스, 박은주 옮김, 당대, 2002)도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난 호 북마크에서 소개했던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가 <자본>과 같다면, <시계 밖의 시간>은 <공산당선언> 같은 책이다. 비릴리오가 ‘질주학(dromologi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속도를 향한 무한경쟁의 메커니즘을 정리했다면, 제이 그리피스는 그 무한 경쟁이 어떻게 인류와 자연을 파괴해왔는지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그 무한 경쟁이 없는 시간 개념이 어떤 모습인지를 서사시처럼 들려준다.

그리피스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의 월경과 출산, 공동체의 축제와 신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시계시간과 어긋나는 시간의 흐름이며, 고발하는 것은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계시간의 이론적 배경이 된 뉴턴 과학과 개신교 전통이다. 이 둘의 야합이 여성의 시간과 축제의 시간, 신화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타도하는 과정을 마녀사냥(중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에 의해 저질러졌던 범죄였던 것이다), 메이폴과 같은 전통 축제의 폐지, 역사학의 근대화 등을 통해 보여준다. 이 과정을 통해 근대는 시간을 화폐로, 오랜 시간에 걸친 토착민의 지혜를 서구적 기술 진보로, 땅의 온기와 결합된 현실의 시간을 태플론의 냉기와 결합된 사이버 공간의 시간으로, 시간의 끝이자 새로운 시간의 시작인 한 인간의 죽음을 냉동보존과 유전자복제로 대체해버린다.

그리피스는 여성, 축제, 신화의 시간을 종합하여 근대 시계시간에 맞서는 대안적 시간, 즉 야성의 시간을 그려낸다. 그가 야성의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빌린 것은 섹스와 술, 순간, 놀이, 그리고 음악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변덕과 쾌락, 자연의 다양함을 상징하는 신인 ‘판(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염소의 모습을 한, 가축을 지키는 신. 호색한으로 유명하다)’을 이야기하고, 또 판에 악마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기독교의 증오를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면 반대 방향을 바라볼 뿐, 맑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꼭 빼닮은 책이다. (공안문제연구소가 베버에게 찬양·고무의 혐의를 씌운 것이 이 때문일까?)

시간 개념을 현학적으로 설명하는 책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어쩌면 시간은 모티브일 뿐, 자연친화적이고 모계중심적인 비서구 토착 사회를 찬양하고 근대 서구 물질문명의 침략에 분노하는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열 페이지를 빼곡이 채운 참고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풍성함만으로도 훌륭히 제 몫을 다하는 책이다. 특히 기술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네트워커들에게 수많은 고민을 전할 책이다. 예를 들어 다음 이야기.

국제적 잡지 <부활>의 편집자 사티슈 쿠마르는 소년 시절 인도에서 자이나교의 승려였다. 자이나교 규율 중 하나가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없는 기술은 결코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걷기 시작했다. 델리의 간디 묘지에서부터 모스크바, 파리, 런던, 마침내 워싱턴까지 걸었다. (중략)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어느 곳을 가든 나는 그곳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곳에 있기 위해서 앞을 향해 걸었다.”(본문 382∼383쪽)

하긴, 그의 어머니는 숄 하나 만드는 데 6개월이나 걸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수놓는 기계를 사자는 딸에게 “시간을 절약해? 시간이 부족하니? 신이 시간을 만들 때 넉넉히 만들었단다. (중략) 너는 무한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한도가 있는 자원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만둬, 나는 바늘을 쓰는 게 좋아!”라고 가르쳤던 분 아니었던가!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보리 편집부 엮음, 보리, 1997)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