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7호 만화뒤집기
첼로켜는 고슈의 두 얼굴
“주문이 많은 요리점”, 민영 옮김, 이가경 그림, 우리교육, 2000

김태권  
조회수: 2694 / 추천: 44
미야자와 켄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동화작가? 시인? 농촌운동가? 그러나 정작 서른 일곱으로 마감한 그의 삶은 길지도 않았으며,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 또한 짧고 간단하지만, 그 내용을 꼭 집어 “그래 이게 무슨 뜻이지”라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다. 거꾸로, 다양한 해석은 가능하고 모범답안은 없는데, 예컨대 다다(Dada)의 시처럼 의미불명한 것은 또 아니다. 백석의 시에 매혹되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틀림없이 켄지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백석의 글을 당시 사회와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켄지 또한 그러하지만, 그 경우 놓치고 마는 부분이 생겨서 억울하다. 사회적 해석 역시 해석의 한 가지로서 즐길 수 있을 따름이다.

글에 그림을 붙이는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의 입장에서, 켄지의 작품은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나름대로 아름답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로 그려야겠다는 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도 자신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도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다만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스타일을 견주어가면서 감상한다면 크나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단편 동화 <첼로 켜는 고슈>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일이 있는데, 예술 애니로 작정하고 만들었음에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완성되어, 국내에도 진작 소개된 바 있다(요즘에도 새벽에 TV를 틀다가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과장 없는 따뜻하고 담담한 필치로, 비현실적이고 판타지다운 줄거리의 동화를 그려내고 있다. 이 부조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편 이번에는 국내에서 그린 고슈를 보자 : <첼리스트 고오슈>에 붙은 일러스트는 매우 감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켄지 동화의 귀기 어린 면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다양한 색상을 이용하였는데도 채도가 낮고 따뜻한 느낌을 주어서인지, 거의 색채를 이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가경 작가의 일러스트는 단색으로 그려졌음에도 훨씬 더 발랄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자는 푸근하고 잔잔하며, 후자는 번뜩이며 때로 섬짓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원작의 느낌을 잘 살렸을까? 답하기 불가능한 문제이다. 첫머리에 밝혔듯, 켄지의 작품에 고정된 해석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애니메이션도 아름답고, 일러스트로 구현된 고슈도 아름답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켄지 동화의 아름다움이 각각의 형상화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연주와도 같다. 진중한 베토벤도 아름답고 들뜬 베토벤도 아름답다. 흥분하는 지휘자 F와 침착한 K 중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다. 켄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기야, 우리의 주인공 고슈 군이 밤새워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베토벤 6번을 어떻게 연주할까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정답이 없는 만큼 더 어렵고, 그만큼 더 즐거운 일이다.

켄지 역시 우리를 어렵고도 즐겁게 만드는 천재 작가이다. 이런저런 해석들을 놓고 견주어 보는 것이 또한 세상 시름을 잊게 만든다. 다만 그의 대표작 “은하철도의 밤”은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며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수반하지만,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와 견주어 보는 것은 별 의미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은하철도 999의 원작이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지만, 두 작품은 설정만 약간 유사할 뿐, 그 주제나 정서는 매우 다르다. 물론 이 경우 역시 둘 다 어느것이 낫고 어느것이 못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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