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8호 북마크
생명 공학, 휴머니즘을 벗어나는가?
<인간 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이진우 외, 문예출판사, 2004

박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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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인권, 특히 프라이버시 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선악을 판단할 기준이 애매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같은 기술인데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도 한다. 기술뿐만 아니라 정보도 그렇다. 내 정보를 친구가 가지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안 되다가도, 국가나 기업이 가지게 되면 문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친구가 가진 정보가 문제가 되기도 하고,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국가나 기업에 정보를 맡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 기술이 편리한 점이 있다고 해서 조금만 여지를 주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된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스팸메일을 보낼 여지를 열어 놓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원천적으로 막기도 어렵다. 한 선배님 말씀마따나 “인터넷 그 자체가 원인” 아니던가?

잘 알다시피, 이런 고민이 가장 근본적으로 전개되는 곳이 생명공학이다. 그 궁극적 미래에 인간 복제라는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발전과 의학적 활용 정도가 이미 상당한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궁극적 미래상에 대한 입장에서 극단적인 대립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까지가 허용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입장도 판이하다. 각종 난치병 연구에 핵심적인 것이 배아 복제인데, 그렇다고 복제된 배아를 자궁에 착상하는 순간 인간 복제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배아 자체에 인격을 부여하여 보호하자니 낙태를 허용하는 입장과 모순된다.

지난 10월에 방한한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인간 복제를 옹호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이다.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는 유럽 전통에서, 그것도 기술에 대한 경계심이 가장 높은 영역인 철학의 영역에서 인간 복제를 주장했으니,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인간 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진우 외, 문예출판사, 2004)은 바로 이 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 인간 복제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다룬 책이다. 그러나, 사실 논쟁 자체에 대해 많은 비중을 두기보다는, 슬로터다이크와 한스 요나스, 니체의 철학을 통해 인간복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모색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는 책이다.

책 서두에서 저자들은 철학의 근본 전제를 바꾸는 야심찬 기획 의도를 드러낸다. 생명공학의 문제는 응용 윤리의 차원, 즉 기존의 철학적·윤리적 원리를 적용하는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기술의 사용이 문제가 되었다면, 이제는 기술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기술 권력은, 그것이 설령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항상 외부의 ‘자연(Nature)’을 대상으로 한 반면, 이제는 내부적 자연, 즉 인간 및 생명의 ‘본성(Nature)’ 자체를 정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에 관한 부인할 수 없었던 규정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저자들이 선택한 슬로터다이크와 한스 요나스, 니체가 가진 강점은 바로 이 호모 파베르라는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셋 모두 과학기술은 물론, 그 전제가 되는 근대 휴머니즘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제시한 야심찬 기획의도, 즉 응용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철학의 근본 문제를 새롭게 제시했는가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들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기존 철학의 인간 중심주의적 해석이, 저자들의 논의 속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 결과 생명공학 문제를 바라볼 새로운 관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럼에도 장점이 많은 책임은 분명하다. 사실 이 책이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이 공히 쉽게 읽히지 않는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네트워커들에게 다소 익숙한 생명공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에 접근할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또, 정보화 역시 ‘더 많은, 더 확실한 진리’라는 근대 계몽주의 정신이 극단화된 현상이다보니, 네트워커들이 정보화를 바라보는 데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문자 중심의 휴머니즘 대신 새로운 미디어에 기반한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했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이나 무지의 권리에 대한 한스 요나스의 주장, 조화로운 허구를 창조하는 예술가적 인간을 촉구하는 니체의 사상 등을 읽다 보면, 정보화를 다룬 여러 논의에서 나오는 재기발랄한 주장들의 철학적 배경을 확인하게 된다. 생식 및 출산의 의미 변화를 중심으로 인간복제 문제를 접근하는 8장 <인간 복제 시대의 가족-생식 기술의 사회적 효과>에서는 생태주의적 시각 대신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인간 복제가 낳는 여러 쟁점을 고민해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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