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40호(200612) Cyber
개정된 DMCA 우회금지 면책규정, 소비자 매체선택권 여전히 불투명

양희진 / 정보공유연대 IPLft 운영위원   lurlu@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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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플레이어 등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가 대중화되면서 CD나 DVD 타이틀로부터 콘텐츠를 하드웨어로 복제하는 ‘리핑’도 매우 일반화되었다. 사람들은 CD나 DVD 타이틀을 구입한 뒤 리핑하여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에 담아 넣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이제 CD 플레이어를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그런데 리핑 때문에 미국의 한 회사가 곤경에 처했다. 로드앤고(Load'N Go Video, Inc.)라는 이 회사는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아이팟과 DVD 타이틀을 동시에 구매하는 고객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고객이 구입한 영화 타이틀을 고객을 대신해서 리핑해서 아이팟에 저장한 뒤 발송했다가 미국 영화사들로부터 제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21세기 폭스, 유니버설시티 스튜디오 프로덕션, 워너브라더스, 디즈니 등 8개 헐리우드 영화사는 로드앤고사의 이 같은 행위는 자신들의 저작물을 불법적으로 복제하여 배포한 것이며, 자신들이 저작물의 접근이나 복제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 기술적 조치를 불법적으로 회피한 행위로서 미국의 저작권법과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DMCA)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로드앤고사의 영업 중지를 구하는 소를 지난달 초에 뉴욕 법원에 제기했다.
영화사들은 우선 자신들의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나, 이 사건은 일반적인 저작권 침해와는 양상이 매우 다르다. 로드앤고사는 고객들이 DVD 타이틀을 구입한 경우 고객들을 대신하여 정당하게 구입한 DVD 타이틀을 리핑해 준 것에 불과하다. 로드앤고사가 불법 DVD 타이틀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DVD 타이틀을 구매한 고객이 자신의 사용을 위하여 다른 매체로 카피를 할 권리가 있다면, 이들의 수족이 되어 대신 복제를 해 주었다고 하여 이를 저작권 침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구매 고객이 DVD 타이틀을 리핑하여 사용할 권리를 갖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공정이용(fair use)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심지어 미국 음반산업협회(RIAA)마저도 과거 P2P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스스로 구입한 CD를 리핑하여 MP3로 옮기는 것은 합법적인 행위라는 주장까지 했던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들이 승소할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의 규정 때문이다. 1998년 제정된 이 법에는 저작권자가 저작물에 대해 ‘접근’이나 ‘복제’를 방지하기 위하여 취한 암호화 등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단으로 우회하는 행위를 하면 처벌하는 규정이 있다. 예컨대, 지역코드(Access Code라고도 한다)가 들어있는 DVD 타이틀만 재생되도록 되어 있는 게임콘솔에 모드칩을 장착해주어 지역코드가 없는 무단 복제된 DVD 타이틀도 재생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접근 통제용 기술적 보호조치를 우회하는 것이다.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은 (1) 접근 통제용 기술적 보호조치를 ①직접 우회하는 행위나 ②우회수단을 제공(암호화를 깰 수 있는 프로그램의 제공)하거나 우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으로 간접적으로 우회하는 행위를 처벌함은 물론이고, (2) 복제 방지용 기술적 보호조치의 간접적 우회행위를 처벌하여 왔다.
문제는 복제를 못하게 기술적 보호조치가 되어 있는 DVD 타이틀을 구입하여 그 구매자가 직접 그 내용물을 리핑하여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에 옮기는 것은, 복제 방지용 기술적 보호조치를 우회하는 것이지만, 이는 복제 방지용 기술적 보호조치를 직접 우회하는 행위이므로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에서 직접 금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DVD 타이틀을 구매하여 이용할 사람이 직접 리핑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위하여 리핑을 해 준 로드앤고는 우회 서비스를 제공한 것으로서 ‘간접적으로’ 우회행위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렇게 보면 위 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물론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의 제정 이후로 계속해서 문제되어 왔던 사안이다. 사실상 소비자의 개인적 사용목적의 복제가 공정이용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허용되어 있다면, 그러한 복제가 저작권 침해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작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기술적 보호조치를 우회하였다고 하여 이를 별도로 처벌하게 되면, 결국 그러한 복제를 못하게 되고, 그렇다면 공정이용의 범위가 의도하지 않게 축소된다는 소비자단체의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 릭 바우쳐 의원은 지난해 디지털 매체 소비자권리라는 법안을 발의했었다. 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작권 침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작물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 기술적 보호조치를 우회하는 것은 허용되며, 둘째,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제조나 판매는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영화산업협회나 음반산업협회는 반대로 일반 소비자의 공정이용의 범위까지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번 소송도 그런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것이다. 미국 음반산업협회는 P2P업체와의 소송에서 했던 주장과 달리, 이제 일반 소비자가 리핑하여 사용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반 소비자의 리핑 행위마저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와중에 지난달 22일에는 미국 저작권청과 국회도서관장이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에 대한 면책규정을 재개정하여 발표하였다. 이 법에서는 3년마다 저작권청이 면책규정안을 작성하여 국회도서관장에게 보내면, 국회도서관장이 이를 검토하여 면책규정을 확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면책규정은 3년마다 갱신되므로, 이번에 발표된 면책규정은 앞으로 3년간만 적용된다. 면책규정은 그 동안 소비자단체나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부 확대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화나 미디어 관련 강의시 교수가 영화 클립을 편집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보안 연구 목적인 경우에도 제한적이지만 기술적 보호조치의 우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휴대폰 사용자가 휴대전화 회사를 변경하더라도 기존의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그러나 DVD 타이틀 등을 구입한 소비자의 리핑이나 콘텐츠 복제 기술적 보호조치의 우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마련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도 미국 법원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그 향방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법원이 소비자에게 재생기기의 선택권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로드앤고사에게 어떠한 책임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미국 영화업계가 이번 소송에서 노리는 것은 일반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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