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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결혼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 참가해 비혼에 대한 의지와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했을까, 인터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진행자가 나의 나이를 물었다. 그는 이십대 초반이라는 내 나이와 학생이라는 신분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나이에 결혼여부를 결정하는 건 좀 이르지 않은가요?”라고 물었고, 당황한 나는 나중에 어찌되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는 식의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나이, 좋은 사람을 아직 못 만난 철없는 아가씨의 순진한 생각, 철지난 크리스마스 케잌도 아니면서 배부른 소리 등의 수식어가 ‘비혼’을 주창(?)하는 나의 발언에 앞뒤로 붙는 순간이었다. 꽤 열심히 준비해 갔던 그날의 인터뷰는 그렇게 찜찜한 기분으로 끝이 났고, 나는 결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몇몇 결혼한 주변 친구들이 스스로를 당당히 ‘기혼녀’라고 호명할 수 있는데 비해, 같은 나이임에도 스스로를 ‘비혼녀’라고 지칭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로 성인 이후의 정체성을 고정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은 ‘결혼’이라는 행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 한 자’로 인정받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언제나 ‘결혼 미완성’의 상태가 남을 뿐이다. ‘미혼’이라는 말의 빈약함을 ‘비혼’으로 바꾸었으나, 그 역시 ‘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나이’인 나에게도 결혼에 대한 입장은 중요했다. 오랫동안 만난 남자 애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도 그것이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믿음이 흔들렸던 적도 없었고 주변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와 만나는 햇수가 늘어갈 수록 점점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단 한번도 결혼하자, 라든지 결혼을 약속하자, 라는 따위의 쉰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자신의 며느리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애인 어머니의 친절이라든가, 졸업과 동시에 결혼할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암묵적인 예상은 그를 만나는 시간의 두께가 비대해지면 비대해질수록 나를 압박해 왔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반응이 가장 나를 동요시켰는데, ‘결혼도 안 할 거면서 남의 인생 발목잡을 일 있냐’는 거였다. 남의 인생 발목잡을 일 없었던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그와의 연애를 정리했다. 눈물콧물 짜는 신파 따위, 물론 없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무엇으로 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켜켜이 쌓일 뿐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새롭게 시작한 연애는 소위 말하는 ‘동성연애’였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입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남자 애인과 살아가는 것이 ‘결혼해야 함’에 걸리는 문제라면, ‘여자 애인’과의 삶에 있어서는 ‘결혼할 수 없음’이 곤란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녀와 함께 앞으로의 삶을 구상하는 일은 무엇 하나 순탄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나 내가 아파도 병원에서 상대방의 보호자가 될 수 없으며, 서로를 보험 수혜자나 상속인으로 지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사회적으로 인생의 동반자임을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들이 장밋빛 미래를 가로막고 있었다. 특별히 결혼에 원한 지은 것도 없고, 결혼하려는 사람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방해한 적도 없는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결혼이 자꾸만 내 인생에 태클을 걸고 있었다. 결국 결혼은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과 선택하지 않는 사람, 선택할 수 없는 사람과 선택하기 싫은 사람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결혼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대체 왜, 왜, 왜 결혼하려 하느냐?”라는 대답은 역설적이다. 결혼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장려되는 가장 정상적인 삶의 규범이므로 스스로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결혼하지 않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하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박은 비혼이 결혼에 대한 공격인 것처럼 오해되거나 ‘저출산 고령화’ 이슈에 단골 메뉴로 등장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호도되기도 한다. 비혼자들이 기혼자들에 대해 특별한 악감정이 있는 것도,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담론은 실체 없이 매체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갖는 일에서부터 동반자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일까지, 결혼한 사람들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권리를 저지당해야 한다면, 결혼은 그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투쟁해야 하는 영역인 이들에게도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각자의 포지션과 입장이 다르고 삶의 방식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정상가족 밖’의 여집합으로 분류되어 받아야 하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는 함께 힘을 합쳐 싸워나가야 할 부분들이 무수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삶을 ‘결혼/미혼’이라는 이분법으로 정체화하고 규정하려는 사회적·문화적·제도적 장치와 담론들을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떠도는 ‘가족해체의 위기’는, 그런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다. 가족은 단 한번도 해체된 적이 없다. 사회에서 규정하는 ‘이성애 중심의 혼인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가족의 모양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 이성·동성애인, 반려동물, 친구,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문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다양한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여 반목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사회적 농간에 있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순탄치 않아 보였던 연애들은 끝이 났고, 나는 지금 혼자서 앞길을 바라보고 있다. 혼자 남겨진 지금, 이제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음과 할 수 없음이 충돌되는 기묘한 존재가 아니라, 내 삶의 준비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의 인생을 착실히 준비해야 하는 이십대 초반, 다른 사람들이 결혼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내 나름의 삶을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중이다. 나는 결혼의 안티가 아니라 내 삶의 열렬한 팬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