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3호 장애없는
수화는 언어다
청각장애인의 정보통신격차 해소를 위하여...

김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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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전화를 발명함으로써 복잡한 기호조합을 사용하였던 모스전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반인도 쉽게 원거리통신을 할 수 있는 전기통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 후 마르코니(Marconi)의 무선통신 발명으로 라디오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드포레(De Forest)의 3극 진공관 발명으로 무선전화기술의 혁신을 이루었다. 이러한 기술들을 기반으로 거듭된 정보통신의 발전에의해 현재 건청인(健聽人: 청각기능에 장애가 없는 일반인)들은 시간?공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정보공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통신의 발전이 다분히 음성언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들은 정보통신의 발전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인터넷 기술의 발전, 초고속정보통신망과 영상압축기술의 발전은 청각장애인들이 원거리 수화통신을 가능하게 하여 정보격차를 좁힐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그 예가 인터넷을 통한 화상채팅과, 영상전화기를 통한 수화통화이다. 최근 들어 영상전화의 경우 청각장애인들에게 수화를 통한 전화통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또한 영상전화는 원거리에서 청각장애인들이 민원을 처리하거나 진료를 받는 등 원격서비스의 수단으로도 일부 사용되고 있다. 지난 호에 살펴보았던 통신중계서비스와 같이 향후에는 영상전화나 인터넷망을 통하여 건청인과 청각장애인간에 수화통역인이 개입하여 통신중계를 해주는 영상통역(Video Relay Interpreting)서비스나 독화통역(Speech-to-Speech Interpreting)서비스에도 보편화될 전망이다.

최근에는 한국기술연구원에서 ‘신체장애인을 위한 착용형 단말 인터페이스’ 개발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청각장애인들의 의사소통을 지원하기 위한 과제도 있다. 이 기술개발의 목표는 초고속 유무선 통신망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정보 교환이 가능하도록 PC 하드웨어를 착용가능한(wearable) 수준까지 소형화?경량화 하여, 장애인들이 비장애인 또는 다른 장애인들과 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일상생활 활동에 필요한 기능을 보조해주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개발 과제 중에는 청각장애인들이 건청인들과의 의사소통 지원을 위한 수화인식기술 개발도 준비중이다. 이 기술은 음성인식 기능을 이용하여 음성언어를 문자로 변환하고, 다시 수화로 변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모션캡쳐 기술을 이용하여 수화의 개별 동작들을 생성하고, 동작을 합성하는 기술로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이를 동영상 또는 애니메이션에 적용할 예정이다. 이 기술이 성공을 거두면 청각장애인의 일상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에도 접목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청각장애인의 통신망과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미래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기술 개발에 대한 환경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현재 수화언어를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언어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재 추진되는 기술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지난 해 한국농아인협회가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기자회견은 수화를 하나의 언어로 국가정책에 반영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진행하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발표자들은 ‘청각장애인의 정체성 확립과 보편적인 수화언어의 통용을 위하여 정부가 모든 정책에 수화언어를 일반언어와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에서는 ‘수화는 청각장애인들의 보편적인 언어임에도 그 동안 수화언어를 비언어로 치부해 버렸을 뿐 아니라 저급한 의사소통양식으로 매도되어 왔다’라고 정부와 사회에 질타를 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언어’를 ‘생각이나 느낌을 음성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수단과 체계(DAUM국어사전)’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들이 음성이나 문자이외의 언어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인 수화를 언어에서 배제시켜왔다.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수화는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의사소통 양식이다. 수화는 청각장애인들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있는 언어이다. 수화는 건청인들이 발성을 통해서 표현하는 음성체계와는 다르게 손을 통해서 표현하는 시각운동체계이며, 수화만의 통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청각장애인들은 수화에 의해 생각하고,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은 "수화는 농아인의 모국어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수화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언어로 인식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들이 있다. 캘리포니아대 인지과학부 그레고리 힉콕 교수와 샌 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에드워드 클리마 교수는 한 잡지에 "수화는 인간의 두뇌에서 언어로 인식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0여 년 간 뇌 손상을 입은 장애인들의 두뇌활동(수화실어증)을 관찰한 결과, 수화능력도 건청인의 음성언어 처리능력(말하기와 이해력)을 담당하고 있는 두뇌의 왼쪽 부분(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힉콕 교수와 클리마 교수는 "이 같은 결과는 수화가 비록 손이나 몸짓으로 표현하지만, 단순한 시각?공간적 행동과는 별개의 것으로 확실한 언어영역이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2001. 7. 11). 이와 유사한 논문은 이 외에도 여러 언어학자들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았을 때 수화는 언어로서 구비해야 할 조건을 갖추고 있는 언어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정부는 청각장애인들의 의사소통권과 정보접근권의 보장은 수화언어를 일반언어와 동등하게 자리 매김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있을 때만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추진 예정인 장애인을 위한 정보통신 기술들이 중도에 좌절되지 않고, 청각장애인들이 장벽 없는 의사소통과 정보접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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