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3호 과학에세이
원숭이들의 떼죽음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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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는 처지라서 내가 속한 연구소에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이다. 최근 예기치 않은 사고가 터져서 여러 직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연구소에 우연히 들렀다. 자정을 전후하여 연구소의 변압기 내부코일이 파열되어 연구단지 일부와 가까운 아파트 3천여 세대가 정전사고를 겪었고, 비상발전기까지 가동하면서 즉각 복구했지만, 연구소에서 사육하던 필리핀원숭이 26마리와 마모셋원숭이 73마리가 열사병 증세로 죽었다고 했다.

필리핀원숭이는 개 크기의 원숭이로서 마리당 약 1천만원이고, 마모셋원숭이는 흰쥐 크기의 가장 작은 원숭이 종류로서 번식력이 강해 대부분 연구소에서 번식시켰는데, 마리당 약 3백만원이다. 이들 원숭이는 모두 연구소에서 신약과 신물질 개발 등 연구용이나 전임상 실험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건의 경위는, 공식적으로는 이렇다. 변압기가 파열되는 순간, 또는 정전상태에서 복귀하는 순간에 과전압이 발생하여, 사육실 온?습도 조절용인 공조기 온도조절밸브 제어판넬(DDC)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제어프로그램과 경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사고가 발생했다.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벌어졌던 실제 상황은 좀 더 구체적이다. 한밤중에 원인모를 정전이 발생했다. 기술자들은 재빨리 응급조치를 취했고, 2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복구를 끝냈다. 사고에 대한 후속조치의 하나로, 기술자들은 사고로 인하여 문제가 빚어질 수 있는 실험실의 관계자들에게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대부분의 실험실에서는 그 시간에도 전화를 받았고,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설혹 정전이 되었더라도 자동적으로 온도가 조절되며, 문제가 생기면 휴대폰을 통하여 경고메시지가 전달되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기술자들은 안심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불행하게도, 사고가 난 실험실의 담당 직원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별다른 일이 없음을 확인했거나 아무 일 없다고 예단한 전기실의 기술자들은, 연락을 애써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실험실에서는 떼지어 죽은 원숭이들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실험실 직원들은 마치 사람이 사고를 당한 듯 통곡했다. 연구소의 한 보직자가 말했다. 난데없는 변압기 사고가 없었더라면 원숭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사고가 났더라도 온도조절장치가 고장나지 않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설혹 고장났더라도 기술자들이 실험실 관계자들에게 끝까지 연락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사고 즉시 그 사실을 상급 기관에 보고했더라면, 은폐 또는 축소 의혹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세겹 네겹의 완고한 안전장치를 비웃듯이 비껴가면서 사고는 일어나고, 당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항상 속수무책이다. 사고는 본디 그런 것이다. 모두가 예측할 수 있고, 누구나 피할 수 있다면, 사고는 이미 사고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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