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7호 사이방가르드
‘게릴라걸들’의 고릴라 가상극장
현실 극장의 역할론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여성 전사들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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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초 사회 심리학자인 어빙 고프만은 ‘극작(dramaturgical)법’이란 방법을 통해 현대인들이 어떻게 자아를 드러내고 상대와 사회적 관계망에 들어가는지를 잘 살핀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행위가 이루어지는 ‘극장’의 비유를 든다. 무대 위의 행위자는 우리의 가시적 행위를, 시나리오는 우리의 감춰진 내면의 동기와 욕구를, 감독은 우리의 의식을 대신한다. 여기에서 자아의 재현은 극(劇) 작업과 동일시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역할을 결정하고 그 역할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타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신의 정보를 드러낸다. 물론 자아와 타자들간에 형성된 관계와 상황은 사회적으로 통합된다.

한번 자아와 타자간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거기서 발생하는 모순이나 의심 등이 배제되고, 사회의 도덕적 기초가 서로를 규정하고 억누른다. 연배가 높은 자와 낮은 자, 남성과 여성, 배운 자와 무식한 자 등의 각 역할자들은 서로 적절한 무대 행위를 기초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기능값을 수행한다. 이의 거시 통합적 모델은 바로 사회 조직의 모습이다.
고프만의 무대에서 각자는 역할 가면에 충실하지만, 행위자간의 관계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구조를 발견하기 어렵다. 행위 관계망를 벗어던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의 역할을 취하는 반역이나 저항의 행위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현실의 극장이 보여주는 억압적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관계의 생성은 고프만의 이론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한 여성 예술가 집단의 성장에서 관찰된다.

`게릴라걸들’(Guerilla Girls)은 바로 현실 극장의 역할론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여성 전사들이다. 1985년 뉴욕시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169명의 전시회에 고작 13명의 여성의 작품이 걸리면서, 성적 불평등과 인종적 차별이 만연한 예술계의 현실극장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여성 예술가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백인 남성 중심의 예술계에 대한 여성 게릴라들의 반란이었다. 이들이 ‘걸’이란 명칭을 선택한 것은 동성애자(게이)가 ‘퀴어’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하다. 현실 극장에서 남성의 ‘마초’ 근성을 드러내는 ‘걸’을 여성 자신의 것으로 재전유하려는 ‘언어 놀이’(the linguistic game)의 일환이다.

게릴라걸들이 현실극장의 관계를 교란하는 중요한 방법은 익명성이다.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신원을 가린 채 죽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빌려쓰고, 공식석상에서 ‘고릴라’의 가면을 뒤집어 쓴다. ‘게릴라’를 ‘고릴라’로 잘못 발음하면서 생겼다는 이들의 고릴라 가면은 마초 중심의 현실극장을 붕괴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수행한다. 고릴라 뒤에 숨겨진 인물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하기 힘듦으로써 그녀들에게 사회가 규정하는 역할론은 사라진다. 본모습을 뒤로 하고 오직 분노와 강렬함을 전하는 고릴라 가면만이 무표정하게 드러남으로써 고릴라가 전하는 익명의 메시지에 주목하게 만든다. 고릴라 가면에 의한 현실 배역의 거부, 바로 이것이 게릴라걸들이 남성 우위의 현실 극장을 뒤흔드는 근거다.

사실 고릴라 가면의 보다 유연한 형식은 인터넷과 더불어 진화했다. 전자 네트워크 안에서는 익명의 자아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나 자유롭게 생성된 새로운 자아, 소위 ‘아바타’(avatar)를 대리로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 그래서 게릴라걸들은 고릴라 가면을 통한 정치적 실천뿐만 아니라 고릴라 아바타를 통한 가상의 익명전에도 참여한다.

온라인 퀴즈, 포스터, 비디오, 관련 문서뿐만 아니라 주제에 따라 게릴라걸들 명의로 익명의 전자편지를 마초 사업주에게 보내는 코너와 토론을 원활하게 이룰 수 있게 한 전자게시판도 전술적으로 활용된다. 현실극장의 불평등 구조를 뒤흔드는 방법으로 가상극장의 익명성을 적절히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극장의 역할론이 강력할 때 가상극장에 치중한 전술은 허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게릴라걸들이 놓치지 않는 것은 거리와 네트 모두에서 성적, 인종적 불균등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 있다. 한편 가상극장의 활용은 공감대를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현실극장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의 폭넓은 참여를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앞으로 이들이 벌일 현실극장에 대한 가상극장에서의 교란과 불복종의 시도가 예사롭지 않다. 일상의 권력이 배정한 배역을 거부하고 고릴라 가면을 쓰는 순간 현실극장의 질서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마치 게릴라걸들의 사이트에 걸린 남성성의 상징인 맛 간 바나나처럼 단단해 보였던 마초 사회가 여름철 더위에 녹아나듯 서서히 문드러져 갈 것이다. 게릴라걸들이 현실에서 착용하는 고릴라 가면만큼이나 이들의 가상가면이 현실극장 무대 위의 비상식을 깨는 실천적 힘이 될 수 있는 근거이다.

* 게릴라걸스의 책들
Confessions of the Guerrilla Girls, Perennial, 1995.
The Guerrilla Girls' Bedside Companion to the History of Western Art, NY: Penguin, 1998.
Bitches, Bimbos, and Ballbreakers: The Guerrilla Girls' Illustrated Guide to Female Stereotypes, NY: Pengui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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