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8호 정책제언
국민의 지문은 국가의 것인가?
형사소송절차 및 수용중 과도한 지문날인 요구의 문제점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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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가 ‘데모’를 시작하고 나서 여러번 경찰에 잡혔었고, 짧지 않은 시간을 감옥 안에서 보내야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지문날인을 한 것을 다 헤아려 본다면, 아마 수천 번은 넘을 것이다. 물론 열 손가락의 지문을 다 찍은 적도 있지만 그중 가장 혹사를 당했던 것은 단연 오른손 엄지손가락이다. 아직 지문이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문날인반대운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면, 아마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소측과 작은 싸움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전 국민 열손가락지문날인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열손가락지문날인제도가 법률유보의 원칙,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원칙, 과잉침해금지 원칙 등 헌법의 기본적 이념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만 17세가 된 모든 국민이 법적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열손가락의 지문을 모두 날인해야 하는 것과, 경찰조사나 참고인 조사시 지문정보를 수집하여 이에 대한 전산화 및 임의활용도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인권단체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서 즉각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최근 지문날인반대운동을 보면서 이 운동은 법과의 싸움이자 자신의 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유로 수감되어 있는 한 인권활동가가 구치소에서 영치금품사용시 지문날인을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그러나 이미 국가인권위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진정을 몇차례 거부한 적도 있고, 규정이 있는 한 국가인권위에서 긍정적인 결정이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기회에 형사절차속에서 지문날인제도를 아예 폐지시킬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할 것이다.

만일 이러저러한 이유로 구속되어 구금시설에 수감되는 경우 얼마나 많은 지문날인을 해야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일단 경찰조사에서는 진술서 맨 마지막 이름 옆에 오른손 엄지 지문을 찍게 한다. 또 전페이지를 접어 뒷면이 나오게 한 후 해당 페이지에 겹치게 만들어 역시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간인’이라는 것을 찍게 한다. 매번 조서를 작성할 때마다 이과정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그후 범죄수사기록표라는 노란표에 우선 양손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날인하고, 십지지문을 찍게 한다. 조사가 끝나고 유치장에 들어가면, 돈을 포함한 모든 소지품을 영치물품보관봉투에 넣고 물품의 목록에 본인확인 지장을 요구한다. 경찰조사과정에서 수십개의 지문을 채취당하고 검찰에 넘어가게 되면 검찰에서의 조사가 시작된다. 검찰조사역시 경찰조사 때처럼, 조서의 맨마지막 날인과 매 페이지마다 해야 하는 ‘간인’을 요구 받게 된다. 혹 조서의 일부를 오타 등의 이유로 수정하게 되면 또 거기에 지문을 찍어야한다. 이렇게 경찰서에서 검찰로 가서 조사를 받은 후, 그날 밤 처음으로 구치소로 들어가게 된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은 가히 지문날인과 함께하는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경찰서 유치장에 처음 들어갈 때처럼 모든 소지품, 옷, 신발까지 영치시켜야한다. 모든 물건을 시커먼 자루에 넣고 나면, 속옷만 입은채 영치시킨 물품의 목록을 확인하며 또 지장을 찍어야한다. 마구 구겨진 고동색 미결수복을 지급받고, 방으로 들어가 첫날밤을 맞이한다.

다음날 아침부터는 이제 지문날인의 릴레이가 시작된다. 일단 생필품들, 식음료품들을 구입해야하는데 이것들의 목록을 쭉 적고 나면 확인 지장을 찍어야한다. 이틀 후쯤 물건들을 가져다주는데 이때도 정확히 받았다는 지장을 찍어야한다. 신문구독, 약·책·우표 등의 구매신청과 수령에도 날인이 필요하다. 가족들이 내복을 넣어 주었을 때, 친구들이 책을 보내주었을 때에도 잘 받았다는 확인을 오른손 엄지로 해야한다. 구금시설에서 소장이나 보안과장 등의 면담이나 특별한 용무를 신청을 해야할 때 모두 ‘보고전’을 제출해야하는데 여기에도 항상 날인을 해야한다. 재판부에 탄원서나 반성문을 쓸때도, 검찰이나 법원에서 서류가 올때, 변호사 선임계를 내야할 때도 날인을 해야한다. 무엇인가 해야할 때 구금시설에서 지문날인은 필수조건이다.

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42호에 따르면 “피의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만 신원확인서류에 지문날인을 요구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에서는 영장이 있어야만 강제집행을 할 수가 있다. 실제 시위도중 연행되었던 인권활동가들이 지문날인을 거부한 채 석방된 후, 몇 달이 지나 영장을 보고 날인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구금시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수용자의 신분에서 구금시설이라는 압박감은 지문날인을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더군다나 영치금품관리규정 14조에는 “수용자가 영치금으로 물품구입을 원하는 때에는 수용자 본인의 손도장이 정확하게 나오도록 날인을 받아야 하며, 문제발생시 증거자료로 활용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문날인을 거부하면 영치금품의 사용이 불가능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수용생활이 너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의 지문정보를 수집하여, 범죄수사나 변사자의 신원확인 등에 활용하겠다는 정부의 안일한 정책, 위조 신분증이 많기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 등이 있다는 이유로 지문을 날인하게 하는 경찰의 행정편의주의적인 태도는 즉각 시정되어야 한다. 문제발생시의 증거자료로 쓰기위해 전국 6만여명의 수용자등에게 매일같이 지문날인을 강요하고 있는 법무부의 규정은 당장 폐지해야한다.

정부는 얼마든지 지문날인을 대체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위조신분증이 문제라면 위조할 수 없는 신분증을 만드는 연구를 해야할 것이고, 구금시설에서 영치금 사용시 문제가 발생한다면 직원들이 보다 꼼꼼하게 확인절차가 있으면 될 일이다. 문제는 개선 방안의 의지가 있느냐이다. 더불어 아무렇지도 않게 인주에 손가락을 찍어 날인을 하고 휴지로 한번 닦아내는 우리의 생활습관 역시 바뀌어야한다.

내가 직접 형사소송절차들을 겪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내 스스로 일상적인 인권침해에 너무나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알몸수색, 부당한 지시, 끊임없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생활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고문이나 가혹행위 같은 사건이 생기면 국민여론이 들끓게 되지만, 수시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인권침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침해가 묵인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 싸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일에 동참하자. 법제도의 개선이전에 나부터 행동하는 것이 다시 필요한 시기이다.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각종 민원서류를 발부받아야할 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지문날인 된 주민등록증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자. 나부터 오늘 내 오른손 엄지 지문이 들어있는 주민등록증을 가위로 잘라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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