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8호 사이버
‘공’과 ‘깡’
성별화의 내밀한 전략

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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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에 대한 공포를 난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다. 공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나에게 날아온다.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 공포심을 유발한다. 공이 돌덩어리도 아니고 맞아보아야 얼마나 아프겠냐만 날아오는 공은 공포의 대상이지 놀이의 대상이 되기 힘들었다. 비록 돌덩어리를 집어 던지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은 전쟁이었지 놀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공을 가지고 겨루는 많은 스포츠는 사실 작은 전쟁이다. 그 전쟁이 어린 나한테는 버거웠던 셈이다.

초등학교 4학년쯤의 일이다. 그 당시는 야구공을 가지고 놀아도 대개는 ‘가짜’ 야구공을 가지고 놀곤 했었다. 실밥이 박혀있는 가죽으로 된 야구공은 비싼 물건이라 아무나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가 그 ‘진짜’ 야구공을 들고서 셋이서 야구를 하자고 졸랐다. 나는 방망이를 휘둘러본 적도 없었고, 공을 글러브로 받아본 적도 없었다. 졸라대는 것을 못이겨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섰다가 내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앞 이 하나가 부러졌고 입술은 퉁퉁 부었다. 그 후로 공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 결과로 난 아직도 얼굴로 날아오는 모든 공을 피한다. 그러니 헤딩을 못하게 되고 결국 축구도 못한다.)

축구든 배구든 농구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나를 향해 공이 날아오는 공포를 감내해야만 적응할 수 있는 운동경기들이다. 구기종목에 능통하려면 공에 맞아도 괜찮아야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야하는 것이 첫 번째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에게 오히려 대들 수 있어야 그제서부터 이 ‘놀이’는 자신의 ‘놀이’가 될 수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고, 그러나 여전히 공에게 대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를 함께하지 않는 것은 주류적인 흐름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방과 후에 축구나 농구를 함께하며 끈끈해지는 그들 사이의 ‘우정’의 틈바구니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체육시간에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하게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숫자 채우는 일이고, 숫자 채우는 일의 역할은 대개 뒤에 멀찌감치 서서 흘러오는 공이나 쳐내는 수비수의 역할이다. 축구에 단련된 아이들은 공을 무기삼아 그야말로 ‘공격’을 해오고, 나는 한 두 차례 저항을 해보지만 대개는 장애물 정도의 수준으로 항상 ‘돌파’를 당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있어 공격적인 남성의 이미지 중 대표적인 것은 축구공을 몰고 돌진해오는 키 큰 남자아이의 모습이다.

공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 것은 흡사 주먹을 날리고 주먹을 피하는 싸움의 그것과 같다. 주먹을 피하기 위해서는 주먹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한다. 싸움을 잘하려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공을 똑바로 보지 않고, 심지어는 눈을 질끈 감고 헤딩을 하겠답시고 머리를 들이밀면, 그나마 아무데도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콧잔등이나 입이나 뺨을 사정없이 강타당하고 만다. 눈을 뜨고 저 하늘 높이서 내게로 날아오는 공을 마주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맞아봤자 별거 없다는 ‘용기’를 가져야한다. ‘깡’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성의 남성으로서의 학습은 이런 방식으로 지속된다. ‘깡’을 가질 것,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 남을 ‘제압’함으로써 나의 능력을 확인할 것, 등과 같은 덕목들은 공을 갖고 노는 단순한 과정 안에서도 남성을 남성화하는 기제로 둔갑한다.

나는 내 자리를,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고, 내게 그런 것으로 유일한 것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는 시간에도 ‘공부’를 해야한다며 슬쩍 피했고, 한국 사회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문화에 끼이지 못하면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사회로 나온 후에도 공에 대한 부담은 여전하다. 정기적인 체육대회와 작고 큰 놀이의 와중에 항상 ‘구기종목’은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참가하지 못하는 남자는 무언가가 ‘모자란’ 것이거나 적어도 ‘남자답지’ 못한 것이어서 스스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가끔은 축구를 잘하게 되는 꿈을 꾸기까지 한다.

명시적인 그 어떤 억압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부터 나의 남성임을 자극하고 몰아세우고 그것을 나의 욕망으로 변화시키는 이 놀라운 성별화의 전략. 그것이 끔찍하게 여겨지는 또다른 한 장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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