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9호 사이방가르드
아우토노미디어 출판사의약장수 이동서점

이광석  
조회수: 3691 / 추천: 59
내 어린시절 시골 동네에 불현듯 찾아들었던 가장 반가운 손님은 서커스단과 약장수였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던 귀한 그들이라 여장을 푼 천막 근처를 호기심반 두려움반 배회하던 코흘리개 아이들 틈에 영락없이 나도 가세했었다. 이들이 여장을 풀기도 전에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할 것 없이 일상과 다른 이방인들의 신기한 축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작은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서커스단과 약장수는 “OOO 공연을 절찬리에 마치고 지금 막 전국 순회에 돌입”해 피곤도 할 터인데 지칠줄 모르고 ‘타이탄’ 트럭이나 ‘봉고’ 승합차에 단원들 모두를 싣고 벽지와 오지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제나 그제나 이들의 공연 중 내 흥미를 끄는 대목은 ‘차력’이었다. 차력은 서커스나 약장수의 공통분모이기도 했다. 목으로 쇠막대 구부리기, 묶인 쇠사슬 끊기, 불 삼키기와 뿜기, 칼 삼키기, 이빨로 끌기, 바늘방석 위에 눕기, 유리나 불 위 걷기, 칼 꽂힌 불타는 링 통과하기, 망치로 배 내려치기 등등 살벌하기 그지없는 차력 시연이 내겐 두려움보다는 힘센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처럼 보였었다. 물론 식품의약청의 안전기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회충약, 정력제, 강장제 등 정체불명의 물약들이 연금술사의 신비스런 조제술의 기적처럼 보였음은 말할 나위없다.
그저 용달차만한 조그만 박스트럭 뒷칸에 구하기도 힘든 요상한 책들을 한가득 싣고 미국의 여러 동네들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이들은 길거리나 동네의 작은 바에서 눈요기 차력쇼를 펼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자율유목의 책행상’(autonomadic bookmobile)이란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빈들러스티프’(Bindlestiff) 가족 서커스단과 아우토노미디아(Autonomedia)란 뉴욕의 작은 독립 출판업자의 합작품이다. 사업 내용으로 따지면, 차력과 함께 약 대신 책을 파는 ‘약장수 이동서점’이라 부르는 편이 낫겠다.
거대 서점 체인이 지역마다 복제돼 영세한 소규모 서점을 문닫게 하고, 텔레비전 화면과 헐리웃 스크린이 서커스를 감상의 추억거리로 내몬 비극적 현실에 이들은 서로 뜻이 맞아 대안의 길을 찾은 셈이다. 95년에 시작한 이들의 이동서점 계획은 서커스장에 펼쳐놓은 길거리 가판 도서로 시작하여, 2인 전담 전국 순회팀이 모는 바퀴달린 이동서점으로 독립하는 눈물겨운 역정을 거쳤다. 이들의 생명력은 서커스를 통해 ‘살아있는 것’의 접촉과 감정적 체험을 돕고, 판매망이 없는 소수 출판사들의 목소리를 모아 직접 전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갸륵한 발상에서 나온다.
내가 만나본 이동서점의 주인공 2인, 딩글(Okra P. Dingle)씨와 닥터 플러목스(Dr. Henceforth Flummox)양은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하면 지역 경찰이 긴장한다. 파는 책들이 선정성과 과격성이란 죄목으로 가끔은 몰수되기도 하고, 둘이 보여주는 차력쇼가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해서다. 두 사람의 가장 힘든 일은 쇼보다 책을 보러 오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한다. 배경이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내공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들의 약장수 이동서점은 이제 전국적으로 돌면서 여러 동네의 지역 서점들, 정보 집산지, 모임, 시위 등을 연결하고 정보를 공유하게끔 돕는 촉매자가 됐다. 그들이 싣고 다니는 영세 출판업자들의 책과 잡지뿐만 아니라 길에서 만난 지역 활동가, 대학가의 운동가, 매매춘 여성, 음모론 이론가 등이 쓴 아마츄어식 글들도 이들의 차 뒷칸 도서목록에 추가된다. 동네 공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차력쇼는 전자 미디어에 치여 희미해진 인간의 직접적 체험의 감각을 되살리는 방법이다. 물론 팔리는 책들은 주변과 변두리의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들을 찾아 발굴하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주요 통로다. 순회 이동서점을 통해 약장수와 책행상 각각의 목적이 서로 조화롭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약장수 이동서점이 내 마음을 끈 것은 이들이 꼭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과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유목하는’(auto/-nomadic) ‘발달린 책’(book/-mobile)은 대중매체의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주입의 공중파가 아닌 인터넷에 떠다니는 소수 전자파들에 다름아니다. 똑같은 거대한 공간에 잘 꾸며진 거대 서점에서 배제된 소수의 책들을 모아서 이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직접 찾아다니며 전달하는 행위는 인터넷 기술이 지향하는 수평적이고 소수 지향의 대화 소통 방식과 유사하다.
4평 남짓한 이동식 공간에 각종 작은 목소리를 담고 중간에 모자라는 것은 다시 싣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려주고 하면서 정처없이 부유하는 책들의 이동보따리가 네트를 유목하는 정보와 닮아있다. 인터넷의 민주적 풍경과 유사하게 약장수 이동서점은 현실 속에서 다양성과 소수적 목소리를 전하는 미시적 정보의 통로로 기능한다. 평생을 씻지 않고 살 것 같은 60년대 폭주족 분위기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달리 딩글씨와 잠시나마 나누었던 대화와 악수의 느낌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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