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3호 표지이야기 [주류를 위협하는 대안적 소통의 모색]
블로그적 삶의 스타일과 공동체로서 블로그 페미니즘

너부리 / 진보넷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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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소통의 유대, 힘을 주는 유대로서 진보넷 블로그

개인적으로 작년에 내가 제일 잘 한 일들 중 하나는 우연히! 붉은사랑의 진보넷 블로그를 클릭하게 되어 그녀가 올린 거의 모든 게시글들을 흥미롭게 거의 다 읽고, 나 역시 진보넷에서 블로깅을 시작하여, 진보넷의 다른 블로그들을 열심히 눈팅한 일이다. 진보넷 블로그는 나에게 또 다른 세계들로 들어가는 멋진 출구를 선사해주었다. 각각의 개별 블로거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만들고 있는 세계들은 진보넷을 통해서 비가시적이지만 매우 흥미롭게 연결되어, 또 다른 세계들을 쪼개어 열었다. 눈팅, 덧글, 트랙백을 통해서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감지되긴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건대, 진보넷 블로그의 세계는 소통의 유대(affectively communicative bond)이자 각각의 블로거들에게 힘을 주는 유대(enabling bond)의 공간이다.

이러한 정서적인, 그러므로 정치적인 (가장 정치적인 것은 바로 감정과 정서다) 소통-유대는, 여성인 나의 관찰로는, 진보넷 여성 블로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페미니스트) 블로그적 소통과 유대의 형성은, 개별 블로거들이 진보넷이라는 ‘함께’의 공간을 통해서 다시 증강되고 새로워진 개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블로그를 통한 정서적 소통과 서로를 지지하는 연대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이 증강된 이 개인-블로거들은 사안에 따라서 맥락, 정황, 국면에 따라서 엄청난 집단(collective)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 보루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주체들이다.

완결된 공동체, 진보의 신화없이 작동하는 정치적 주체들: 변혁은 일상에서부터

진보넷 블로그를 통해서 보이는 세상들에는, 해방이나 민주적 공동체, 혹은 이런 저런 진보의 신화들은 작동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고 하면, 원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공동체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킹(소소하게 말하자면 댓글, 트랙백, 무엇보다 눈팅!)을 통해서 "함께 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맹글기(community-in-the-making)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현재진행형으로서 making이다. 즉 이 세계들이 질주해 가는 완결된 공동체라거나 변혁은 없다. 블로그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바, 진보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을 좀더 나은 쪽으로 추동하는 과정이자 힘이며, 변혁은 일상에서부터 진행된다.

진보넷 블로거들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기존의 (억압적이고 규율적인) 제도나 권력들의 다양한 강요에 썩! 잘! 저항하는 것이, (예전에는 내 집 골방이나 서재였다면 이제는) 블로그와 같은 공간 속에서라는 것을. 이러한 과정(in-the-making)에서 일어나는 블로그를 통한 소통은 (허구헌 날 논쟁같지도 않은 논쟁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이성적 합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층위에서 일어난다. 블로그 세계에서의 동의는 지배적으로 ‘감정적’/정서적인 것이다. 감정이야말로 일차적으로 정치적 반응이자 정치다.
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 감정이다. 블로그 세계들을 통해 형성되는 감정의 문화는 매우 효과적이며, (잡히지는 않지만 흔적을 감지할 수는 있는) 눈팅하는 사회성은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저류(undercurrent)를 형성한다. 눈팅의 이런 말없는 사회성은 매우 웅변적이다. 자기 표현 매체로서 블로그는 일상이 유도하는 부드러운 저항의 공간이 된다. 여러 블로그들을 연결해주는 진보넷 블로그는 이러한 각각의 자기표현들이 나누어질 때의 비가시적이지만 커다란 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회적 영향력을 실행한다. 말썽쟁이 공산주의자 바쿠닌의 말을 빌려 쓰자면, "보이지 않는 집합적인 힘."

삶의 미학으로서 행복한 운동, 자기에의 배려로서 정치

블로그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사회적 삶을, 변혁을 그 전체적 모습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은 바로 주체의 일상이라는 점이다. 개인적 공간으로서 블로그와 개인들을 연결해주는 진보넷에는 말 그대로 “따로 또 함께”의 정치학, 생존학, 미학이 가동된다. 진보넷 블로그들을 통해서 엿보이는 새로운 징후들 중 하나는 역설적인/대안적인 유형의 자기에의 배려이다. 즉, 이타성에 기반하고 이타성을 향해가는 것으로서 자기에의 배려. ‘함께’를 통과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이런 류의 자기배려는 ‘싸가지’나 ‘의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구성하면서 미학적 가치의 성격을 띤다.

진보넷 블로거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바, 자기에의 배려와, 타인과 공유함으로써만 얻어지는 행복은 서로를 증강시키면서 동시에 존재한다. 행복추구는 서구 근현대의 강박이었다. 21세기 맑스라면 끝나가는 부르주아 문명의 발악이라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갓 태어난 진보넷 블로그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은 공유하는 행복의 블로그적 출현이며, 이것은 새로운 문화의 징후이기도 하다. 블로그적 행복이 시사하는 의미심장한 점은, 우리가 공동으로 나누는 행복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거의 유일한 행복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급진적인 행복관, 행복실천 아닌가? 이러한 블로그적 소통, 행복은 일상적 차원에서라면 연결하고 관계맺는 기쁨이자 함께 움직여나가는 운동이며,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진보의 문화가 관계짓는 방식들(ways of relating)에서 시작되어, 권력관계를 포함한 여러 관계들을, 즉 관계성 자체를 재배치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또한 시사한다.
공동으로 향유하는 행복, 이타성을 향해가는 자기에의 배려, 지금 여기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대응, 즐거움과 재미의 추구, 감정적 상호작용 등으로 무장한 미학이자 윤리로서 정치.

공동체로서 블로그 페미니즘

각각의 블로거들은 함께 하는 눈팅, 이따금씩의 댓글, 트랙백을 통해서 다시 읽기(re-reading) 혹은 "다시보기(revision)의 과정에 스스로를 연루시킨다. 즉, 되돌아보고, 신선한 눈으로 보고, 새로운 비판적 방향에서 낡은 가치체계들, 낡은 텍스트들 속으로 (재)진입하는 것. 한마디로 함께 읽고 각자 쓰는 블로깅을 통해서 개별 블로거들은 나름의 새로운 시각들, 증강된 역능을 날마다 조금씩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문화사의 한 장(chapter) 이상을 의미한다. 여성들에게 다시보기란 생존행위이다. 우리는 여성이기 이전에 읽지만 읽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여성'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되고, 동시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근본적인 수준에서(radically) 스스로 그리고 따로 또 함께 묻게 된다. 각각의 여성 블로거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눈팅함으로써, 눈팅을 통해서 혹은 오프라인에서 가까운 친구들의 이야기-표현들을 주의깊게 읽어내는 블로그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간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얻게 되는 자기지는 정치적, 담론적 공동체를 향해 나아간다. 이렇게 형성되는 페미니스트 블로그 유대에는 젠더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확장해가는 과정을 종종 동반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여성들은 종종 자판/블로그를 도구로서, 무기로서, 삶을 온전히(wholly) 영위하기 위한 생존수단으로서, 힘과 에너지를 서로 끌어당기고 내어주며 우리 몸들에 자기애를 끌고 올/확장시켜줄 마술지팡이로서 자판/블로그를 사용한다.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핵심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드러내는 여성들의 블로그 글쓰기가 드러내는 바, 글을 쓰는 여성은 힘을 갖고 있다. 여성들이 각자의 일상에서 느끼는 분노, 두려움, 힘이 사회적으로 한갓 '개인적/사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그런 것으로 치부하기를 원하는 사회적 공모/묵인이 가동되는 남성중심적 체제 속에서 여성의 글쓰기는 남성지배를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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