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3호 영화
그녀들은 정의파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이혜란/105‘/2006/여성영상집단 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 추진위원회

시와 / 영상미디어 활동가   fjt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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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독재의 장단에 맞춰 개발을 부르짖는 가락을 타고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인 때, 솜뭉치가 흩날리고 굉음이 쏟아지던 어둔 새벽, 땀에 절은 푸른 작업복을 입고 기계를 돌리던 그녀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성의 시각이 배제된, 여성노동자의 경험과 해석에 입각하지 못한 남성 위주의 노동운동사가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을 조성한 주된 획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풍토에서, ‘여성’노동자의 주체적인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역사쓰기를 시도한 영화가 등장했다. 나체시위, 똥물투척 등 사람들의 호기심을 손쉽게 자극할만한 사건으로 알려져 왔던 동일방직노조의 투쟁.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자매애에 근거하여 고된 노동을 일군 곧은 손마디들이 회사, 어용노조, 정부를 상대로 싹틔운 너무나 정의로우며 질긴 현재진행형인 싸움을, 민주노조운동의 포문을 연 시발점으로 재평가한 수작이다.

대물림 된 가난을 타개하고자 어린 남동생의 학비 마련을 짐 지고 국내 대규모 방직업체인 동일방직에 입사한 10대, 20대의 그녀들 앞에는, 남성 관리직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당 70원의 임금, 화장실 갈 틈도 주어지지 않은 채 곧잘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강도 높은 노동환경과 이를 약으로 버티며 감내해야 할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불어 가난과 차별에 의해 얻지 못한 배움의 기회를 설움의 응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공순이라는 멸시가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움과 친목을 목적으로 한 소모임을 꽃피우며 웃음과 정이 메마르지 않은 시절을 보냈던 이들. 공동체 활동을 계기로 생성된 집단문화는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 당시 동일방직노조는 전 조합원 1300여명 중 1000명에 이르는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회사와 결탁했던 소수의 남성 관리직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어용노조였다. 지극히 당연스레 문제의식을 느낀 그녀들은 이윽고 최초의 여성노조지부장을 선출한다. 그 결과 탄생한 민주노조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과정을 거치며 남녀임금격차해소, 생리휴가 확보, 퇴근 시 몸수색 폐지 등 노동자들의 진정한 바람을 담은 성과들을 이루어낸다. 그렇지만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던 분노가 동력이 되어 시작한 자발적이고 생활이 깃든 싸움은, 어용노조가 득세하던 당시 정권과 자본에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그녀들은 파란만장한 야만의 고초를 앞두고 있었다.

동일방직으로의 유입 배경, 성차별적인 열악한 노동환경, 여성주의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공동체 생활, 민주노조 탄생과정, 나체시위와 똥물투척으로 대변되는 모진 탄압, 비열한 수작에 의해 해고를 당하고 폭력전과범의 멍에를 쓴 채 빨갱이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전개한 회사, 정부, 어용노조에 맞선 끈질긴 싸움, 원직복직을 외치며 오늘 다시 동일방직 문 앞에 서기까지...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20년을 넘나들며 벌인 동일방직노조투쟁의 일지를 14명 여성노동자들의 인터뷰와 빛바랜 사진을 복원시켜 엮어나간다. 동시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해고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전국적으로 유포한 사례가 웅변하듯, 투쟁의 열기를 전이시킬 잠재력을 품고 있었던, 격동의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타고 진행된 동일방직노조투쟁의 의의를 그녀들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려준다.

감독은 사건중심의 일지를 기록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어제와 오늘을 오가며 호흡하는 그녀들의 감정의 결을 따라 인터뷰를 구성한다. 인터뷰이의 감정의 고저에 따라 보는 이 역시, 광포한 물리적 폭력에 뒤따른 공포와 비애, 캄캄한 앞날을 예비한 이들을 휘감은 절망감과 우울함, 그런 와중에서 그녀들을 버티게끔 만든 자매애적 동지감이 어렸던 지난 세월 속으로 어느새 빠져든다. 고단한 한숨, 흥분 섞인 분노의 음성, 잔잔히 머금은 웃음, 먹먹한 채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의 손길을 세심하게 담은 인터뷰는 부차적인 하나의 영역으로 대상화되었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숨결을 불어넣은 노동운동사 재구성 작업의 당위성을 시사한다. 이같이 짜여진 인터뷰에서, 왜곡된 언론 보도 등에 상처를 떠 앉게 된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을 열고자, 제작자가 기울인 적잖은 노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들의 눈빛, 표정, 몸짓, 그리고 목소리로 공백이 되어버린 저항의 역사를 전하려는 감독의 진심은, 복수의 1인칭 시점인 ‘우리’를 나레이션의 주어로 쓴 대목에서도 확인가능하다.

당시 동일방직 사장은 회장이 되었고, 회장의 아들은 사장이 되어 그녀들의 원직복직 요구를 뻣뻣이 거부한다. 여전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로 살아가고, ‘빨갱이년’이라 불리며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뼈아픈 시련은, 시공간에 구애됨없이 팽배한 가부장제의 맥을 끊기 위해, 역시나 끈질긴 투쟁만이 해답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예측할 수 없었던 험난한 억압을 자매애로 뭉쳐 대응하며 ‘성장’해온 그녀들은 여전히 거리 위에 서있다.
* 상영문의: 여성영상집단 움 (02-3141-1369)
위 작품은 제10회 인권영화제 (www.sarangbang.or.kr/hrfil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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