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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활동가가 왜 우리는 정부와 자본이 뭔 일을 저지르면 대응하기에만 바쁘냐고, 앞서서 대안적인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거야 우리에게 그들처럼 힘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움직이며 만들어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혼잣말처럼 대꾸해본다. “미디어의 난”, 여러 혼‘난’과 곤‘난’ 중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동시에 그 대안을 만들어내야 할 텐데, 이 역시 힘겹다.
자유무역협정(아래 FTA) 때문에 방송 시장이 외국 자본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통신 시장은 이미 충분히 열려진 상태에다가 이 참에 추가 개방까지 갈 수도 있다면, 통신 시장 개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방송과 통신이 합쳐진다고 수 년 째 난리 속인데 통신 시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방송 시장이 잠식되는 건 아닌지, 오히려 그렇다면 FTA를 저지시키고 방송 문화의 다양성과 공공성을, 정보통신의 보편적이고 공적 접근 권리를 더욱 강화할 수는 없는지, 아주 중요하고도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만 하다.
미디어 공공성과 다양성을 이 참에 더 세게 밀어붙여 FTA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끄떡없는 상태가 될 수는 없을까. 보다 적극적인 대안 마련은 힘들어도 놓치고 있는 부분들은 어떻게든 대응해야 할 것 같아, 이 글에서는 FTA와 융합미디어 환경의 몇 가지 현안들을 짚어보고 싶다.
통신 시장의 개방 문제
사실 한국의 통신 시장은 이미 예전부터 개방되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세계무역기구(WTO)의 기본 통신협정 최종 양허를 낸 이후 자발적으로 최종 양허 내용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내며 개방해 나갔다. KT를 비롯해 기본통신서비스에 대한 외국인 소유 지분 제한이 벌써 49%에 이르는 등 이미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한 상태이다 보니, 이번 FTA에서 통신 서비스는 별 쟁점이 아니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미무역대표부(USTR)가 의회에 제출한 이른바 ‘협상 통보문’을 볼 때, 통신서비스 및 부가통신서비스의 기술 중립 보장, 부가통신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플랫폼 접근 보장 등의 쟁점과 함께 이 49%마저 넘어서거나 아예 없애버리라는 압력이 감지되고 있다. FTA의 서비스 협상 테이블에 통신과 함께 올라갈 교육/의료/법률/영화 등 핵심 쟁점 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분야”인 통신이 희생 카드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런데 미국조차 유선사업자에 대해 외국인 지분 제한이 없는 대신 그 투자에 대한 강력한 공익성 심사 제도를 두고 있고, 무선사업자의 경우엔 외국인 지분 제한을 20%선으로 묶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적 규제 장치가 없더라도, 엄청난 자본력을 요구하는 미국 통신 시장에서의 지분 인수는 국내 자본에겐 현실적으로 원천 봉쇄돼 있는 것이다. 무역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도 형편이 안 되는 데 무슨 자유무역협정?
신자유주의 세계화 + 방통융합 = 신자유주의적 융합미디어 환경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통신시장 개방의 문제는 국내 통신 산업의 자주성의 문제를 넘어 융합미디어 환경에 미칠 잠재적 파급력 혹은 파괴력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미국 통신 자본과 워싱턴의 추가 개방 요구는 한국 시장에서 막대한 지분 차익을 노리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통신 시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방송 시장까지 침투하려는 전략일 수 있다.
방통융합과 하나 둘 융합 미디어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는 시점 역시 통신 시장의 추가 개방 가능성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이들 융합 미디어 서비스에 대한 법적 규정이나 적절한 공공적 규제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곧바로 통상 현안에 노출된다고 할 때, 인터넷 유료 VOD 서비스나 인터넷방송(아래 IPTV)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초국적 미디어 자본의 투기장이 될 것이 뻔하다. 그 동안 기술의 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디어 환경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처럼 보여 졌던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라는 것이 FTA 국면(시대?)과 노골적으로 조합된다면, 더 정확하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 경제의 지배 논리를 배경으로 맹목적인 시장 확대를 꾀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융합미디어 환경으로 치달아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문제는, ‘우리의 통신 시장을 지켜내자, 그러니 개방 안 되게 협상을 잘 해달라’는 게 아니다. 이미 있는 것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으니 새로운 미디어를 등장시켜 이미 있는 것들 다 버리고 새롭고 더 좋은 거 사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러면서 미디어를 통한 사회정치적 대화와 토론은 극도로 주변화 되고 문화정치적 공공영역은 철저히 상품화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철저히 관철시키려는 FTA 자체가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융합미디어: 보편적 서비스에 대한 침해, 콘텐츠에 대한 통제 문제
핸드폰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특정한 사이트를 통해 걸러진 콘텐츠에만 접속할 수 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 접속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은) 접속료가 비싸서 대중화가 되지 않았고, 그런 만큼 인터넷 접속을 제한시키는 문제가 크게 이슈화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들이 IPTV나 휴대인터넷(아래 Wibro) 등의 새로운 융합미디어 서비스에서도 벌어질 모양이다. KT 등이 사업자로 준비하고 있는 IPTV의 경우, 프로그램 가이드(EPG)와 셋톱박스의 기술적 특성을 이용해 일종의 포털 형태로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콘텐츠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고, 이동 환경에서 무선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기대했던 Wibro 역시 폐쇄적인 형태로 각종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비지니스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전응휘, “‘균형’보다 ‘빨리’가 중요한 정보통신정책,” <네트워커> 33호 참고)
그리하여...
따라서 FTA를 통해 더욱 옥죄어 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환경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이를 거슬러 어떠한 민주적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운동의 전략적 내용과 곧바로 할 수 있는 실천 활동이 정리되어야 한다. 이 참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공공성과 다양성의 개념을 급진화 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보다 급진화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의 공공성 및 다양성을 중심으로 우리의 의제를 던지면서, 한편으로는 정부 차원의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전환과 방송통신 융합을 앞세운 자본의 시장 확대에 대해 어떻게 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동시에 규명하는 전략 속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힘겨운 상황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