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4호 Cyber
구세주 감옥에 갇히다
블루메시아칩 기술적 보호조치 회피수단인가

양희진 / 정보공유연대 IPLeft 운영위원   lurlu@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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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2(아래 PS2)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인기있는 게임콘솔이다. 그러나 용돈이 제한된 게이머들에게 PS2는 한 가지 중대한 단점이 있다. 무단 복제된 게임CD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기술적 원리는 이러하다. PS2는 부트롬(BOOT ROM)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 부트롬은 정품에만 있는 접근코드(Access Code)를 인식한다. 접근코드가 인식되면 그 게임CD가 실행되지만 접근코드가 없는 CD는 실행되지 않는다. 정품CD에는 게임프로그램 말고도 접근코드가 수록·저장되어 있는데, 정품CD를 복제하면 게임프로그램만 복제될 뿐 접근코드는 복제되지 않는다. 접근코드가 게임프로그램의 복제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복제해 봐야 쓸모가 없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복제하기를 단념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접근코드는 이른바 디지털권리관리(DRM) 기술의 일종이다.

접근코드, 다국적 기업의 세계 시장 분할 전략
정품CD에 접근코드를 심는 목적은 복제CD의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정품CD의 시장을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별로 정품CD 시장을 분할・관리하려는 것도 있다. 접근코드는 지역코드(regional code)라고도 하는데, PS2와 그 게임CD의 판매사인 소니 엔터테인먼트는 지역별로 다른 코드를 심어 시장을 분할하여 가격 등을 관리한다.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품CD를 싸게 판매한다고 하여 구입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PS2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의 경우 세계 시장을 지역별로 분할, 지역별로 차등 가격을 적용함으로써 판매수익을 최대로 올리려 한다. 이 때문에 소니사가 지역코드를 활용하는 것을 두고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는 마케팅 전략이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라는 비판이 있다.
한편, 접근코드와 부트롬은 법적으로 허용되는 복제CD의 사용도 차단한다는 점에서는 그 자체가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가정이나 이에 준하는 장소에서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게임프로그램을 복제하는 것은 합법이다. 프로그램 저작권자도 원칙적으로 그러한 복제를 막을 수는 없다. 정품CD를 구입하여, 정품CD의 손상에 대비하여 하나쯤 복제CD를 만든다거나 정품CD를 빌려 한두개쯤 복제하여 사용하는 것은 프로그램저작권 침해가 아니다. 그런데 접근코드로 인하여 어느 경우에나 복제CD를 사용할 수 없다. 저작권자가 법이 그들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은 영역까지 기술적 수단으로 울타리를 둘러친 셈이다.

게이머에게 메시아가 찾아오다
그러나 계속 우울한 일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게임을 죽도록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구세주’는 금방 찾아왔다. 구하는 자 얻을 것이니, 게이머들의 갈증은 금방 해소되었다. 4~5만원 정도면 일명 ‘메시아’, ‘블루메시아’로 통하는 모드칩(Mod Chip)을 PS2에 장착해 주는 서비스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모드칩을 PS2에 장착하면 이것이 접근코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복제CD를 넣더라도 부트롬은 접근코드가 있는 정품CD인 것으로 인식하여 복제된 게임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
게임콘솔과 게임CD를 모두 정품으로 사고도 지역코드가 달라 사용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해 준다는 점에서 모드칩은 소비자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상품이다. 또, 모드칩을 장착한다고 하여 게임프로그램의 복제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니, 게임프로그램 저작권 침해를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드칩이 효용을 발휘하는 단계에서는 이미 게임프로그램의 복제는 끝나고, 복제된 게임프로그램의 사용, 즉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모드칩을 장착해 주는 행위와 모드칩이 장착된 PS2를 사용하는 행위는 언뜻 보기에는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 모드칩이 장착된 PS2를 사용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접근코드가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서 말하는 ‘기술적 보호조치’에 해당되는가, 그래서 접근코드를 무력화하는 모드칩을 장착하는 것이 기술적 보호조치의 우회행위로서 처벌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올해 2월 대법원은 부산의 한 전자상가에서 모드칩을 장착해 준 L모씨에게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위반죄를 인정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 보호조치’란 무엇일까? 우선 우리보다 먼저 이를 도입한 미국법을 보자. 미국법은 기술적 보호조치를 ‘접근통제적 조치’와 ‘침해방지적 조치’(이용통제적 조치라고도 한다)로 엄격하게 나눈다. 접근통제적 조치란 컴퓨터프로그램 등 저작물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기술적 조치를 말하는 것이고, 침해방지적 조치란 저작물 복제 방지 조치 등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소니사의 접근코드는 ‘접근통제적 조치’이고 모드칩은 접근통제적 조치를 회피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드칩 장착행위는 기술적 보호조치의 회피 수단을 제공하는 행위로서, 모드칩이 장착된 PS2에 복제CD를 넣어 실행시키는 이용자의 행위는 접근통제적 조치를 회피하는 행위로서 모두 처벌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법, 접근통제적 기술조치는 제외
그러나 우리나라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상 규정은 약간 다르다. ‘프로그램에 관한 식별번호·고유번호 입력, 암호화 기타 이 법에 의한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핵심기술 또는 장치 등을 통하여 프로그램저작권을 보호하는 조치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정당한 권원없이 기술적 보호조치를 회피, 제거, 손괴 등으로 무력화하는 행위’와 ‘상당히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기기·장치·부품 등을 제조·수입하거나 공중에 양도·대여 또는 유통하는 행위’ 등을 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 보충적으로 적용되는 저작권법도 기술적 보호조치의 개념을 정하고 있다. ‘저작권 그 밖에 이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그 권리자나 권리자의 동의를 얻은 자가 적용하는 기술적 조치’를 말한다. 저작권법에서는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행위 자체는 처벌하지 않고 무력화하는 기기 등의 제조, 수입, 판매 등만을 처벌한다.
두 법에서 정한 기술적 보호조치가 ‘침해방지적 조치’만 포함하는지, ‘접근통제적 조치’도 포함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논란이 있으나, 접근통제적 조치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다수이다. 저작권법을 초안한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서도 “권리에 대한 침해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라는 문구를 기술적 보호조치의 개념에 포함시킴으로써 접근통제적 조치는 제외시키려 했다고 여러 차례 입법취지를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해 ‘접근통제적 조치’를 우회하는 행위도 처벌하라는 통상압력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접근통제적 조치를 직접, 간접 우회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없으나, 앞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미국의 요구대로 체결될 경우에는 모드칩이 장착된 PS2에 복제CD를 넣어 사용하는 일반 소비자의 행위까지 모두 처벌대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모드칩에 대한 대법원 판결, 저작권자의 이익에 편향돼...
그런데, 대법원은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의 여러 규정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기술적 보호조치란 프로그램에 관한 식별번호·고유번호 입력, 암호화 및 기타 법에 의한 권리를 보호하는 핵심기술 또는 장치 등을 통하여, ... 프로그램저작권에 대한 침해를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조치를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소니 엔터테인먼트사가 제작한 PS2에 삽입되는 게임프로그램 저장매체에 내장된 접근코드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제하고, 모드칩 장착행위를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결하였다. 접근코드나 부트롬만으로는 게임프로그램의 물리적 복제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과 동등한 효과가 있으므로 기술적 보호조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입법자가 본래 제외하려고 하였던 접근통제적 조치까지를 법으로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문언상 접근통제적 조치가 보호되는지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여 당연히 이를 제외시켜야 한다. 이것이 죄형법정주의의 대원칙에 부합한다. 셋째, 그동안 기술적 보호조치가 저작물의 공정이용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계속되어 왔음에도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쉽사리 저작권자의 이익을 앞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는 권리와 이용의 균형을 도모하는 저작권법의 목적에도 맞지 않다. 모드칩과 접근코드가 기술적 보호조치가 아니며, 모드칩을 장착하는 행위도 그래서 처벌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호주법원의 판결을 더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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