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4호 기획 [미국의 네트워크 중립성 논란]
네트워크 중립성은 인터넷 수정헌법 1조
인터넷의 미래를 누가 통제하도록 할 것인가?

오병일 / 네트워커   antiropy@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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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는 버스도 다니고, 화물차나 자가용도 다닌다. 또 자가용 중에서는 그랜저, 에쿠스, 체어맨과 같은 고급승용차도 있고 티코나 마티즈같은 경차도 있다. 보통 도로에는 서로 다른 차종이 섞여 운행하고 있다. 간혹 버스 전용차선처럼 대중 교통수단에 특혜를 주거나 안전을 위해 무거운 화물차의 운행을 금지하는 것과 같이 공공정책적으로 교통수단의 종류에 따라 차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급승용차를 위한 전용차선과 같은 정책도 가능할까? 만일 도로를 사기업이 소유하고 있고, 고급승용차가 더욱 많은 통행료를 지불할 수 있다면?

넷 중립성, 네트워크는 데이터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논쟁이 인터넷 정책을 둘러싸고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네트워크 중립성(Network Neutrality)'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줄여서 ’넷 중립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네트워크가 그것을 통해 흐르는 데이터에 대해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넷 중립성은 지금까지 인터넷이 설계되고 구축되어 온 기본적인 원칙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문서, 음성, 동영상 데이터들이 전송되거나, 혹은 메일, 웹과 같은 프로토콜의 데이터들이 전송되지만, 이와 같은 데이터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용하는 것은 네트워크 양 끝에 있는 컴퓨터에서 이루어질 뿐, 망 자체에서는 이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트래픽이 급증하고 인터넷 전화나 방송과 같이 서비스 품질(QoS, Quality of Service)의 보장이 필요해짐에 따라,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네트워크를 오가는 트래픽의 품질을 차등화하여 양질의 서비스에는 좀 더 높은 비용을 부과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트워크를 오가는 트래픽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다.

통신 및 케이블 업체들, 넷 중립성의 제거 요구
미국에서 ‘넷 중립성’의 제거를 원하는 측은 AT&T, 베리존(Verizon), 콤캐스트(Comcast)와 같은 거대 통신 및 케이블 업체들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종량제’가 논란이 되었을 때 제기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5%의 파워유저들이 인터넷 트래픽의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있어, 네트워크를 적게 사용하는 이용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로 인해 매년 네트워크 용량을 증설해야 하는데, 네트워크 구축에 상당한 투자가 발생하는 만큼, 이를 회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IPTV와 같은 응용 서비스의 경우, 높은 수준의 서비스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트래픽에 대한 차별화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3M, 시스코, 퀄컴과 같은 거대 하드웨어 업체들은 네트워크 중립성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금까지 인터넷이 기반한 원칙을 흔드는 것으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응용 서비스 업체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넷 중립성을 무시할 경우 인터넷에 반경쟁적인 환경이 구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용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인터넷 상의 콘텐츠나 서비스에 접근하고, 이용하였다. 그러나 넷 중립성이 훼손된다면, 망 사업자가 자신들에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콘텐츠나 서비스에 더욱 빨리 접속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혹은 경쟁적인 사이트로의 접속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다. 넷 중립성 옹호자들은 지금까지 “수백만 이용자들이 집합적으로 내렸던 결정들이 이제 기업들의 회의실에서 내려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또한, 망 사업자들은 콘텐츠나 응용서비스 사업자들에게 프리미엄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며, 결국 그 부담은 소비자에게 이전될 것이다. 구글, 야후, 이베이, 아마존 등 주요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도 넷 중립성을 옹호하고 나서고 있다.

넷 중립성은 인터넷 수정헌법 1조
옹호자들은 ‘넷 중립성’이 “인터넷 수정헌법 1조”이며, “인터넷이 경제적 혁신, 민주적 참여,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촉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라고 주장한다. 만일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할 수 있는 업체들에게 혜택이 주어졌다면, 적은 자본으로 시작해서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구글과 같은 사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거대 미디어 기업에 비해 개별 블로거들이나 정치적인 그룹의 목소리는 더욱 위축되게 될 것이다.

‘넷 중립성’의 옹호자들은 이와 같은 우려가 현실화된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2004년, 북 캐롤라이나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인 매디슨 리버는 자신들의 이용자들이 경쟁 회사의 웹기반 전화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접근을 차단하였다고 한다. 캐나다의 거대 전화사업자인 텔루스는 노동 분쟁 기간 동안 소비자들이 노조에 동조적인 웹사이트를 방문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도 하였다. 타임워너의 에이오엘(AOL)은 자신들의 이메일 계획안에 반대하는 캠페인 사이트인 www.dearaol.com 사이트를 언급하고 있는 모든 이메일을 차단하였다. 만일 넷 중립성 원칙이 훼손된다면, 이와 같은 검열은 더욱 일상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넷 중립성’을 법에 명시할 것인지 여부가 논쟁이 되고 있다. 통신 및 케이블 사업자들은 넷 중립성 조항을 법에 포함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탈규제’를 주장하며, 이와 같은 법적 규제는 네트워크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넷 중립성’ 옹호자들은 그들은 진정한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미국의 케이블 및 전화 회사들은 이미 초고속 시장의 98%를 지배하고 있다. 단지 53%의 미국인만이 집에서 케이블과 DSL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인터넷의 미래가 달려있다
국내에서도 ‘인터넷 종량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 넷 중립성 논란은 이미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편, 5월 29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제36차 OECD 통신하부구조 및 서비스정책에 관한 특별위원회(OECD Working Party on CISP)' 회의에서는 OECD 작업반이 만든 '네트워크 중립성'에 대한 보고서가 처음으로 공개되고, 업계 및 정부측 전문가들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고 한다. OECD 및 미국에서 넷 중립성 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논란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느냐에 따라 인터넷의 미래가 크게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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