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5호 이슈
디지털방송의 깃발을 찢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 BF명령에 대한 미 법원의 무효화 판결

양희진 / 정보공유연대 IPLeft 운영위원   lurlu@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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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레식은 ‘코드’라는 자신의 책에서 기술적인 코드가 법보다 더 강력하게 제약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무위주의(do-nothing)는 대안이 아니라며, 자유를 제약하는 기술적 코드의 제한을 위해 정부가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보호조치는 저작물의 이용이나 저작물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기술적 코드이다.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또 자주, 기술적 보호조치와 관련된 입법이나 입법적 시도가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5년 지적재산권과 국가정보인프라라는 보고서에서 당시 시도된 기술적 보호조치를 인정하였다. 의회는 1998년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DMCA)에서 저작물에 대한 접근이나 저작물의 이용을 통제하는 조치의 우회를 금지함으로써 기술적 보호조치를 최초로 입법화하였다. 이는 헐리우드업계와 가전제품제조업체 및 IT업체 사이에 DVD 관련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 전에 콘텐츠 보호에 관하여 논의한 끝에 도달한 합의사항이었다. 다만 기술적 보호조치의 표준을 강제하는 것은 IT업체들의 반대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포함되지 않았다. 미 상원의원 홀링스는 2002년에 디지털 미디어 기기에 연방통신위원회 FCC가 정하는 콘텐츠 보안 기술을 포함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인 Consumer Broadband and Digital Television Promotion Act를 제출하였으나, 기술 진보를 가로막는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여 통과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입법이나 입법적 시도는 자유를 제약하는 기술적 코드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 코드를 강화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렌스 레식은 국가권력의 개입이 기술적 코드의 제한을 위해서는 정당화된다고 주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국가권력은 레식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여 왔다.

한편,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아래 (FCC)는 2003년에 BF명령(Broadcast Flag Order)을 발령했다. BF란 ATSC 표준에서 말하는 '재배포 통제 디스크립터'를 의미한다. BF명령에 의하면 모든 디지털TV 수신기에는 디지털 방송 신호에 포함된 BF신호를 인식함으로써 디지털TV 프로그램의 재배포(복제는 제외)를 통제하는 장치를 달아야 한다. 이 기술은 FCC가 사전에 승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4년 8월 FCC는 13개 기술을 승인하였다.
FCC가 이 명령을 발령한 것은 미국영화협회(아래 MPAA)의 강력한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MPAA는 디지털방송은 아날로그방송과 달리 원본 그대로의 복제가 가능하여 방송된 프로그램이 복제되어 인터넷을 통해 재배포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투자 회수를 위해서는 콘텐츠 보호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가전업체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전업체들은 보통 기술적 보호조치를 준수하는 제품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비용, 복잡성, 소비자의 불만족 위험 등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MPAA는 의회를 상대로 로비해 왔고, 홀링스 의원의 법안도 그 결과물이다. 의회에서 입법을 미루고 있던 중, FCC가 그 틈새에 끼어 들어 디지털TV로의 전환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BF명령을 발령하였다.
BF명령이 기술적 보호조치에 관한 다른 입법과 차이가 있는 점은 콘텐츠의 재배포만을 금지할 뿐 복제는 허용한다는 점이다. BF명령에는 “우리는 디지털방송TV를 위한 재배포 통제 시스템의 명시적인 목적이 콘텐츠를 인터넷이나 이와 유사한 수단을 통해 무분별하게 재배포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의도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은... 소비자들이 저작권법에 상응하여 방송 프로그램을 가정 내 또는 이와 유사한 개인적인 환경에서 복제하거나 이용 또는 재배포하는 것에 개입하거나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BF명령이 어떻게 집행될 것인지에 관하여는 명확하지 않았다.

FCC가 처음 BF명령안을 발표하였을 때부터 미국도서관협회, 전자프론티어재단(EFF) 등 미국 시민단체들은 BF가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발하였다. 개인적 사용을 위한 복제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인지 FCC가 명백히 하지 않는 한, 계속된 산업계의 요구를 고려할 때 BF명령은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있었다. 실제로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FCC는 복제를 제한한 기술도 BF명령의 채택 전에 개발된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한 예가 있었으므로 시민단체의 우려는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미국도서관협회 등은 콜롬비아주 연방항소법원에 FCC의 BF명령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BF명령은 저작권법과 충돌하여 허용할 수 없다는 점, 디지털TV 프로그램을 인터넷을 통해 재배포하는 것은 실제의 위협이 되지 않으며, 실제의 위협이 된다고 해도 BF명령이 실효적이지 않다는 점, BF명령이 법률이 부여한 FCC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법원은 지난해 10월 FCC가 BF명령을 규정할 법령상의 권한이 결여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BF명령이 위법이라고 판시하였으며, 원고의 다른 주장은 판단하지 않았다. 소비자 단체등은 일제히 이 판결을 환영하면서, 이제 어떠한 디지털방송 수신기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반겼다. 반면 MPAA와 몇몇 단체들은 이 판결로 인해 디지털방송의 발전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고 실망을 표했다. MPAA는 BF명령이 의회의 제정법을 통해 되살아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의회를 상대로 하는 MPAA의 로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버클리대학 로스쿨의 한 교수(Molly Shaffer Van Houwelling)의 BF명령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BF명령은 재배포만을 금지했을 뿐이지 사적 복제는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저작권법에서 추구하는 균형을 유지하고 기술적 보호조치를 규제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것이 로렌스 레식이 주장한 바대로, 기술적 코드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사례라고 하였다.
샤퍼 교수나 레식 교수의 분석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유효한 지침이 되는 데는 부족한 것 같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 보호조치가 때로는 저작권법에서 허용한 공정이용의 범위를 잠식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권리자와 이용자간의 이해관계의 조정을 위해 국가권력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우리도 정부나 의회를 향해 그러한 기술적 코드가 있거든 이를 규제하라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그런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그러나 레식의 분석은 한계가 있다. 국가권력이 MPAA와 같은 자본가 집단의 이해를 도모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여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레식 이론의 이런 한계는 국가권력의 중립성을 은연중에 전제한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레식은 민주주의의 실패는 정부가 너무 많은 대중의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실패를 기술적 차원의 문제로 접근한다. 레식은 MPAA와 같은 자본가 집단의 돈 로비를 받는 정부관료와 의원들 뒤에 고매한 정신을 가진 이상적인 정책결정자가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BF명령마저도 샤퍼 교수가 인정한 바와 같이, 비록 소비자의 일정한 자유를 존중하였지만, 정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기술적 보호조치 체계를 부과한 것이었다. 기술적 조치에 대한 국가권력의 운동방향은 국가권력의 본질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고, 우리의 유효한 행동지침도 막연한 국가주의적 국가관이나 자유주의적 국가관에 기대서는 도출될 수 없다. 레식에게는 Broadcast Flag를 ‘찢을’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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