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5호 영화
출혈-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료제도
로나 그린/2004/67‘/미국

시와 / 영상미디어 활동가   fjt79@hanmail.net
조회수: 4268 / 추천: 59
“아직도 안 드셨어요?”
“암보험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답니다.”

한두개의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니, 알 수 없는 미래를 방치해 둘 심사냐고 불안한 마음을 돋우는 민간의료보험 광고를 참 자주 만난다. 치아는 아픔을 호소하지만 치과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견적이 얼마나 나올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진단 이후 감당해야 할 무거운 몫 때문에 차라리 덮어두고 외면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친숙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기 마련인 건강에 관한 두려움을 담보로 민간의료보험 가입을 종용하며 새삼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을 타개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민영화된 의료시장의 현주소는 꽤나 자극적이다.

보건의료영역의 민영화 추세를 가속시키는 엔진을 달아줄 계기라고 지목되는 한미FTA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건강권의 실종이 불러올 파국의 일상을 가늠해보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출혈 -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료제도>는 공공성을 잃어버린 미국 의료 시장의 가혹한 현실을, 탄탄한 국영의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쿠바사회와의 대비를 통해 부각시킨다. 특히 열악한 노동환경과 철저히 이윤의 증가를 노리고 움직이는 보건의료시장 때문에, 생존을 위한 절박한 일상을 영위해 갈 수밖에 없는 미국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보건의료영역의 민영화에 대해 새삼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감독 자신의 사적이면서도 사적이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불안정한 삶을 ‘선택’한 그녀는, 미국 사회에 어쩔 수 없이 변방으로 내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읊조린다.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동시대 쿠바인들의 삶을 담고자 보건의료노동자들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게 된 감독은 안정적인 국영의료제도를 구축하고 있는 쿠바 사회의 면면을 확인하게 된다. 무상의료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그곳에서 건강이 돈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 각 개인은 주치의를 두고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 예방의 효과를 보며, 몸이 신호를 보내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향한다. 미국의 경제봉쇄정책으로 인하여 의약품의 절대적인 부족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작업 요법의 개발을 통하여 대안적인 치료를 지속시켜 나간다. 환자의 몸을 우선시하며 자발적으로 친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쿠바 의료진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건강권을 건강‘권’으로 규정지으며, 의사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쿠바인들의 모습에서 배어나오는 당당함을 체감한 감독은,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미국의 공공의료제도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된다.

건강을 지극히 상품으로 취급하는 미 의료제도의 상업화된 현실은 가까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은 고된 노동을 수행하며 살아가지만 적절한 의료보험조차 갖지 못하는 엄마와 오빠의 생존을 향한 몸짓을 보여주면서, 의료보험 없는 삶을 살아가는 4천 3백만의 미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고된 삶을 실감케 한다. 민간보험회사와 관리의료기관만이 의료제도의 주체인 냥 행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주와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의료보험의 보장 여부, 보장 가능한 질병의 범위 등이 결정된다. 저임금, 고용불안정 등 노동환경의 전반적인 후퇴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이 의료보험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건강이 아닌 영리를 중심 화두로 삼고 있는 관리의료기관은 서슴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비용을 줄이라고 말한다. 이에 의료진은 적절한 약제 사용은 고사하고 치료에 지출되는 비용이 증가하는 걸 막기 위하여 진단가능한 질병도 묵인한다. 감당할 수 없는 약값 때문에 약을 쪼개 먹고, 응급실로 달려갈 돈이 없기 때문에 집에서 위험천만하고 서투른 응급조치를 한다.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없어 고통을 주는 치아는 그냥 빼버리고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낼 뿐이다.

스스로의 몸에 학대를 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연출하는 영화 속에 새겨진 끔찍한 이미지들은 실로 두렵다. 공공의료제도가 붕괴된 이후, 아마도 파편화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인 냥 남겨질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상을 감내하기에 우리는 많이 빈곤하다. 한미 FTA의 체결을 계기로, 데이터 독점권 제도, 치료방법 특허 인정 등 지적재산권이 강화되고, 투자자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리라 예측하고 있다. 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치료와 의약품의 접근도를 차별화시키려는 의도를 막아내는 움직임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오늘과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한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 이 작품은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배급하고 있지 않지만, 한미 FTA의 문제점을 공유하기 위하여 각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상영회를 여는 것은 가능합니다. 노동조합이나 학교 기타 커뮤니티 등에서 이 작품을 상영하고 싶으신 분은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 미디어문화행동(http://www.gomediaction.net)의 상영배급 게시판에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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