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6호 달콤쌉싸름한페미니즘
‘누구와’ 더불어 사는가?
동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푸근 / 언니네트워크 운영위원   pugn@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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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녀석’이 나의 삶에 끼어들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돌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동안 가부장제적인 한국사회에서 돌봄의 몫은 누구에게 있어 왔던가? 공/사영역의 분리라는 미명아래 여성들에게 자녀 양육은 물론, 노부모부터 손주까지 떠넘겨 왔다. ‘돌봄’을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문화, 제도, 규범의 차별성에 분노하다보면, 어느덧 ‘돌봄’의 가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돌봄의 의무로부터는 멀리 떨어져있고 싶어진다. 우리사회는 여성들에게 돌봄의 의무를 지우고, 이것은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경제활동의 제약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를 돌보며 더불어 사는 것의 가치가 소중하니까 여성들이 그 모든 것을 떠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글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반려동물과 함께 살게 되면서 그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돌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동물과 함께 살아가면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싶다.

너는 어디서 왔니?

‘이 녀석’을 알게 된 것은 작년 11월쯤이었다. 친구가 집에 강아지가 와 있으니 놀러오라는 것이다. 한 번도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던 나는 그렇게 두 달 된 강아지 ‘루미’를 처음 보았다. 전체 길이가 20센티나 되려나, 그 조그만 것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킁킁킁 냄새를 맡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친구는 자신이 일하던 기관에서 10대 여성의 요청으로 강아지를 맡게 되었다. 그 여성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강아지도 함께 돌봐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 10대 소녀는 강아지를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면서, 동물병원에 강아지를 맡기고 싶었으나, 의사는 한쪽 눈만 갈색인 시쭈는 상품가치가 없어서 입양처를 찾기 어려우니 안락사를 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소녀는 도움을 요청한 기관에 강아지까지 부탁하였고, 춥고 어두운 사무실에서 이틀 밤을 보낸 강아지를 더 이상 그곳에 둘 수 없어서 친구가 집에 데리고 왔던 것이다.
친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강아지를 오래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돌봐줄 사람을 열심히 찾았다. 여러 군데 입양처를 찾았지만 루미는 가는 곳마다 심하게 말썽을 부리거나, 밤새도록 짖는다며 거절을 당하고 다시 친구에게 돌아왔다. 친구는 급기야 루미를 예뻐하던 나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며칠 또는 몇 달씩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봐서 돌봐야 할 존재가 생긴다는 것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었다. 심리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친구는 내가 여행을 갈 때는 자신이 강아지를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조건으로 루미는 나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부담에서 교감으로

가는 집마다 말썽을 피우던 녀석이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에 온 날은 얌전히 하루 밤을 보냈다. 갈등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집에 낯선 존재가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 녀석은 아무데나 똥, 오줌을 싸놓고, 아무거나 깨물고, 밥도 내가 주지 않으면 못 먹으며, 똥, 오줌도 스스로 치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내가 돌보고 함께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이 모든 과정을 실제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갓난쟁이 아기를 키우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어떻게든 교감해야만 동거를 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오줌과 똥을 내가 원하는 장소에 싸게 하는 것이었다. 배변훈련을 시키는데 5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루미는 ‘안돼’, ‘앉아’, ‘엎드려’, ‘먹자’, ‘나가자’, ‘맘마’, ‘가져와’ 등의 10가지 이상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루미가 아플 때마다 병원을 데리고 가고, 루미를 돌보면서 인간과 동물의 위계적인 관계를 허물고, 다른 생물체지만 서로를 교감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차츰 루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슬플 때, 무서울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의 평화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나에게 떠넘기다시피 한 친구를 원망하기도 하고, 강아지를 덥석 받아 온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했다. 평온한 내 일상에 누군가 돌을 던져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랫동안 그것을 수습해야만 하는 짜증과, 부담이 뒤섞인 기분이랄까. 집에 강아지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밥만 주고,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차츰 강아지와 교감하고, 정이 들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혼자 있을 강아지가 안쓰러워 일찍 집에 들어가게 되고, 같이 산책도 하고, 함께 놀고, 예뻐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가 책임지고 돌봐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존재’를 아끼고 보살피면서 인간관계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그 사람이 좋아서 아낌없이 주더라도 어느 순간 어떤 형태로든 ‘기대’하는 것이 생긴다. 하지만 강아지에게서는 그런 기대를 전혀 할 수 없고, 하지 않게 된다. 내가 강아지에게 이 만큼의 돈과, 이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고 해서 ‘그 녀석’이 그것을 알 리는 없다. 다만 내가 주는 애정만 알지. 그렇게 대가를 바랄 수 없는 존재를 보살핀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정서적 감정을 갖게 했다. 기대하지 않고, 기대할 수 없는 관계에서 주기만 하는 경험은 나 자신의 마음을 꽉 채울 만큼 풍부하고, 따뜻한 감정을 주었다.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세상을 반성하며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집 근처의 길과, 공원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평소 세심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유리가루, 인간이 뱉은 껌과 침들은 끊임없이 냄새를 맡으며 맨발로 길을 걸어가는 동물에게 유해한 것들이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 운동장과 대학 캠퍼스는 강아지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공원이 적은 서울에서 마음껏 뛰놀지는 못할지언정, 산책할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들이 단지 귀엽다고 샀다가, 무책임하게 버리는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음식물쓰레기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서울에서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어 가거나, 유기견 보호소로 보내져, 입양처를 찾지 못하면 한 달 이후 안락사 되고 있었다. 게다가 버려진 강아지를 시장에 갖다 팔아서 강아지의 살은 개고기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털과 가죽은 가죽을 판매하는 곳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동물을 키우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중심, 남성중심, 성인,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 인간이 얼마나 동물을 소비의 대상으로 사유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소와 돼지, 닭은 인간이 먹기 위해 사육되고, 강아지와 고양이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애완’으로 취급되어 왔다. 인간들이 숲을 가로지르는 빠른 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당한 멧돼지들은 고속도로로 튀어나오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동물들이 밭으로 침입해 먹이를 찾게 되었다.

이 세상에 인간만 사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주체는 누구인가? 제인 구달은 『희망의 밥상』에서 인간들이 더 많이 먹고 소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이, 생명의 존엄성도 지키지 못한 채 사육되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채식을 주장한다. 그 동안 나는 반려동물과 함께 하기 전까지 동물들 또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생존할 권리에게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고 살지 않았다. 내가 ‘반려’동물과 함께 관계를 맺고 교감하게 되면서 다른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 KBS에서 동물학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중국에서 어떤 규제도 없이 사방 1미터도 안 되는 철장에 밍크를 키워서 제대로 죽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죽을 벗겨서 판매하는 과정이 나왔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그리고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떤 세상을 꿈꿔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자본주의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세상에서 어떤 환경을 만들고, 누구와 더불어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의 반려동물 루미는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고 있는 폭력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하고, 어떻게 동물과 자연과 평화적인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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