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식감독 |
스스로 80년대 중반부터 양산된 영화 매니아 1세대라고 자칭하는 태준식 감독. 그런데도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물었더니, 흘러 흘러 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란다. 영화를 배우러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세상을 배우고, 영상을 통해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이 다큐멘터리보다 부담감이 더 크고, ‘필름’보다는 ‘비디오’가 더 호소력 있는 수단이었다는 것이 특별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1995년에 ‘노동자뉴스제작단’(아래, 노뉴단)에 가입하면서, 그는 <일터에서>(1998), <꼭 한 걸음씩>(1999), <인간의 시간>(2000),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2003),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2005) 등 노동문제에 관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 중 특별히 ‘아픈 손가락’이라 할 만한 것에 태준식 감독은 주저 없이 <노동의 시간>을 꼽는다. 450일간 계속된 현대 중기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노동의 시간>은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인권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이 그 영화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저만의 스타일, 그러니까 기초를 다져주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전반적인 영상 제작과 관련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고마운 작품이에요.”
청구성심병원 노조의 투쟁 보고서인 <꼭 한 걸음씩>도 그에게 각별한 작품이다. 위암과 싸우면서 보건의료노조 사업에 헌신하다 얼마 전 작고한 이정미 지부장을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또한, 노뉴단에서 한 사업장의 투쟁을 집중해서 기록한 최초의 영상이기도 하다.
노동의 시간에서 창작의 공간으로
이처럼 노동 운동 현장만 뛰어다녔던 그가 이번엔 저작권법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생뚱맞은 것 같지만 <농담 같은 이야기>의 기획 기간은 1년이 넘었다. 개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던 중, 2005년 초에 저작권법 개정안이 발효됐다. 모든 블로그에서 음악이 사라지는, 말 그대로 ‘조용한 혁명’을 지켜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창작자인 감독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해서 다른 주제보다 부담도 덜 했다.
“게다가 작년 말에는 우상호 법안이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를 통과하고, 또 한미 FTA도 터졌어요.”
아무래도 태준식 감독이 작품 만들기 편하라고 하늘이 도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작품을 찍으면서 나름의 우여곡절이 없을 수는 없는 법! 지난 4월, 그동안 그가 준비했던 내용을 모두 버리게 된 일이 있었다. 저작권보호센터 단속팀장과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 사람 논리가 참 명확하더라고요. 그리고 올해 초에 저작권보호센터가 문화관광부 내의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내부로 소리 소문 없이 들어간 일이 있어요. 그게 우상호 법안이 통과될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래요. 정부와 문화 자본의 입장이 정말 견고하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그것에 반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 있는 철학이 다르잖아요.”
인터넷이 고마운 창작자
결국 방송저널리즘적인 찬반 논쟁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구성을 택한다. ‘공정 이용 정도는 보장해주면 안 되는가?’라는 애매한 주장 대신, 감독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풀어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농담 같은 이야기>에는 심각하고 날이 선 분위기 대신 신나는 음악이 흐른다. 국회의원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대신, 밴드와 블로거가 나와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감독이 보기에 인터넷은 무법천지의 소굴이 아닌, 자유롭고 즐거운 소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농담 같은 이야기>도 자유롭고 즐겁다.
“창작자로서 저는 인터넷에 많은 빚을 졌죠. 제가 만들었던 작품의 기본 소스들은 대부분 디지털 환경에서 구한 거예요. 음악, 화면,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서 만드는 프로그램까지도. <농담 같은 이야기>에서도 중간에 외국인들이 나오거든요. 그 사람들 제가 모셔다 촬영했겠어요? 다운로드해서 섭외한(?) 배우들이죠. 인터넷은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에요. 즐겁게 소통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공간이니까요.”
불법 다운로드를 커밍아웃하다니! 흔히 TV에서 보는 가수, 배우, 감독들이 “불법 다운로드 그만!”이라며 외치는 것과 정반대이다. 자신이 땀 흘려 만든 것이 돈도 못 받고 마구 공유되면 창작 의욕이 꺾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그 말은 결국 자기 작품을 상품으로서 제작했다는 거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돈을 가진 소비자로만 본다는 거잖아요. 천박한 이기심으로밖에 안 보여요. 그런 인식 속에서 문화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저작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요. 더군다나 국가가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이 무슨 박통 시절도 아닌데….”
또한, 저작권에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창작자의 상상력이 제한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작품을 만들면서 다른 이들이 만든 것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데, 저작권을 강화시킨다면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기는커녕 더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견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태준식 감독은 <농담 같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저작권과 관련된 전반적인 이슈들을 다룬 시리즈를 만들 계획이다. 부제가 ‘저작권 제자리 찾아주기 프로젝트 1.0’인 것도 그 때문이다. 10.0 정도까지 계획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10.0까지는 아니고요. 처음에 기획했을 때부터 음악뿐만 아니라 만화, 영화, 웹 부분 등 모두 고려하고 있었어요. 장르별로 창작자와 저작권이 충돌하고 있는 이야기를 모아 저작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번 작품은 문제제기 수준으로 짧고 단순하게 만든 거죠.”
<농담 같은 이야기> 한장면 |
닫힌 채널을 통해 열린 채널로
<농담 같은 이야기>는 오는 10월 28일 KBS 1TV의 <열린 채널>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열린 채널>과 태준식 감독의 인연은 깊다. 그러나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으로….
지난해 12월 17일,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가 <열린 채널>을 통해 방영된 적이 있다. 삼성화재가 자사의 이익을 위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조각가 고(故) 구본주 씨를 자살자와 무직자로 몰아붙인 횡포를 고발한 작품이다. 하지만, 당시 그 다큐멘터리는 온전히 방영되지 못했다. 삼성의 압력으로 <열린 채널>이 ‘삼성’과 ‘이건희’가 언급된 부분을 마스킹과 ‘삐-’처리를 한 것이다.
“자본이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미디어를 장악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열린 채널>이라는 공간을 더럽힌 거죠. 이런 것을 보면 검열은 점점 교묘하게 강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때문에 그는 현재 <열린 채널>에 대응하는 싸움을 기획하고 있다. 이름하여 ‘닫힌 채널’ 운동. 독립 영화 제작자 3~4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닫힌 채널’은 9월에 있을 KBS 시청자 위원회 회의 때, 시민 미디어 운동 진영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채널>의 운영 체계를 바꾸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자~ 놀아보자고!”
노동 운동 영역을 넘어서 창작과 검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는 점점 자신의 행동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활동이 지칠 법도 한데, 그에게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실망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옳지 못한 것들에 대해 계속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의 진정성은 정말 빛나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카메라에 잘 담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의 존재감을 찾고 싶어요. 그리고 권력과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죠.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우리도 즐겁고 재미있게 살면서 끈질기게 너희와 싸울 것이다!’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서태지 이야기를 꺼낸다. ETP페스트에서 서태지가 ‘시대의 아픔 속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바친다.’라며 <시대유감>을 부르는데, 노래 부르기 직전에 외친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자~ 놀아보자고!”
‘크~’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흥(興)’ 을 잃지 않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보통 무심코 지나가는 것에서도 그는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을 만들어 낼 줄 안다. 그가 언젠가 꼭 한번 다루고 싶은 소재는 서울 신촌의 작은 골목길에 있는 분식점이다. 자신이 자주 찾는 곳인데 무척 싸고 맛있는 곳이라고 자랑부터 한다.
“근처에 KT 지사가 있어서, 그 분식점에 KT 비정규직 젊은애들이나, 수위 아저씨들이 주로 와요.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오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밥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계약 시기가 돌아오면 속내 이야기하고, 상사 욕도 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담아서 만들면 이 사회의 축소판이 될 거예요.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진솔하게 담기지 않을까 싶어요.”
그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꼭 찍어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카메라를 어떻게 설치할 것인지 고민인 것이다. 잘못하면 CCTV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내 “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죠.”라면서 웃는다.
현재 태준식 감독은 노뉴단에서 나와 혼자서 영상 제작 활동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어려운 독립 영화인데, 더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별로 없다며 가볍게 웃어넘긴다. “그래도 있지 않나요?”라고 캐물었더니, 역시나 즐거운 대답이 나온다.
“어렵다는 생각이야 독립 영화 하는 사람들만 하는 고민은 아니잖아요. 이런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는 것인데, 독립 영화를 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할 수는 없죠. 오히려 자기 작업 열심히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 아니겠어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앞으로도 그의 흥겨운 카메라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렌즈를 반짝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