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8호(200610) 북마크
어느 일본 아나키스트 아저씨의 생활상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자일리톨 /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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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낙원이 있다면 열대지방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겨울의 추위도 없이 사시사철 런닝셔츠 한 장 달랑 걸치고 야자수 아래에서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다가, 배고프면 나무열매 따 먹고 물에 들어가 물고기 잡아먹고, 좀 입맛이 땡긴다 싶은 날엔 멧돼지 바비큐를 뚝딱? 물론 곧 TV에서 가난에 지친 필리핀 사람들이 장기매매에 나섰다가 감염이 되어 죽기도 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꽃을 팔던 태국의 소녀가 차에 치어죽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래, 그래도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내게는 가장 좋은 곳일 거야’라고 생각을 돌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낙원을 꿈꾸는 한 아나키스트 아저씨에 관한 소설을 소개할까 한다. 이 책은 “남쪽으로 튀어”라는 제목과, 만화책 같은 책표지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그것도 운동권 아버지, 학교폭력, 가출, 아버지가 다른 누나, 정파간 파벌싸움, 살인, 환경파괴 등의 무거운 소재를 매우 유쾌하게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우에하라 지로라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입을 빌려 서술된다. 지로는 초등학교 6학년답지 않게 속이 깊은 아이다. 방과 후 전자오락실, 만화방이 몰려있는 나카노 브로드웨이로 달려가는 또래 아이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조그만 찻집을 운영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야무지게 집안일을 챙기는 보기 드문 아이다.

지로네 집은 엄마가 찻집을 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자신이 자유기고가라고 우기지만, 지로의 눈에는 집에서 판판이 놀고먹는 사지 멀쩡한 인간백수일 뿐이다. 이 아버지가 사고라도 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왕년 혁공동(아시아혁명 공산주의자 동맹) 행동대장이었던 아버지는 “콜라, 커피, 케찹은 미 제국주의의 음모”, “세금을 내야한다면 난 국민을 관두겠어.”, “경찰은 국가의 개”, “학교는 안 가도 좋아”,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체제순응형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최면술”을 외치며 주변사람들(특히 공무원들)과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킨다.

이런 지로에게 몇 가지 문제가 닥친다. 가쓰라는 동네의 소문난 불량배가 계속해서 자신과 친구를 괴롭혀서 돈을 뜯어가고, 아버지는 지로의 수학여행비가 과다책정 되었다며 학교를 상대로 투쟁에 들어가는 와중에, 조직 내 내홍 때문에 잠시 지로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 아버지의 후배 아키라 아저씨가 상대정파의 우두머리를 살해한 사건에 지로네 일가가 연루된다.

이 일로 도쿄에서 살 수 없게 된 지로네는 아버지의 고향이었다는 오키나와 이리오모테섬으로 이주하게 된다. 일본본토에서 오키나와도 멀지만 이리오모테섬은 일본 본토보다는 타이완과 더 가까운 아열대의 섬이다. 일본만화 아즈망가 대왕에 나온 천연기념물 이리오모테 고양이가 서식한다는 이 섬에는 빽빽한 아열대밀림이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폐가에 들어와 살게 된 지로네는 섬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섬 생활에 적응해 간다. 비록 냉장고도 없고, TV도 없는 생활이지만, 사유재산 관념이라는 게 거의 없는 섬사람들과 없는 것은 빌리고, 있는 것은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살기 시작한다. 특히 달라진 것은 집에서 판판이 놀던 아버지가 섬에서는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는 등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게 된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온 가족이 이런 깡촌으로 오게 된 것이나, 섬에 온 후부터 신이 나서 들떠있는 아버지와 엄마가 지로는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지로가 살고 있던 땅을 소유하고 있던 도쿄의 리조트 개발회사로부터 집을 강제 철거하겠다는 명령서가 날아든다.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도 강건한 자본주의적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개발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하지만, 그 투쟁은 결실을 맺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했던 지로는 투쟁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결국 그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은 우에하라 집안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을 짜임새 있게 배열함으로써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또한, 등장인물들도 나름 매력적이다. 좌충우돌하는 아버지나, 전 세계를 무전여행중인 염치없는 캐나다인 베니(그는 초등학교 급식을 얻어먹기 위해 교사들에게 알랑방귀를 끼고, 아이들에게 당신은 뭘 가지고 왔습니까, 이것 밖에 먹을 게 없습니까라고 묻곤 한다), 지로의 애늙은이 동갑친구 무카이 등등. (하지만 시종일관 아버지를 따르는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지로의 엄마는 답답하다 못해 신경질이 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인 것은 그런 황당한 아버지가 이따금 내뱉는 말들이다. “혁명은 한사람 한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개인단위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야”,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낙원을 꿈꿀 뿐이야. 낙원을 추구하지 않는 놈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없지”
당신도 아직 낙원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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