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9호(200611) 표지이야기 [의료정보화의 그늘]
EMR로 병원노동자가 망가진다.

이황현아/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연구원   lh2a@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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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고 일어나면 개인정보유출이라는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한다. 그 가운데 유독 두드러지는 내용은 채권추심을 하는 남친을 돕기 위해 2만 여명의 개인정보를 빼돌린 이야기, 대형 로펌의 판ㆍ검사 출신 변호사들의 연봉이 6-27억 원에 달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런 어마어마한 개인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건 다름 아닌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통해서였다. 건강보험공단이 갖고 있는 개인정보란 개인의 질병과 복용하는 약 등에 관한 정보일 텐데, 아뿔싸, 이게 새어나가고 있다.
환자개인정보는 전자의무기록(EMR)로 수집・저장・관리된다. 환자가 진료를 원할 때 진료내용과 처치 등이 고스란히 컴퓨터에 입력되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최근 몇 년 전부터 EMR을 운영하며 의료정보화의 핵심 물꼬를 트고 있다. 일차적으로 병원에서 입력된 환자개인정보는 청구를 위해 건강보험공단과 네트워크 되어 있다. 진료개시부터 마감까지 차트 없는 병원은 성큼 다가오고 있다.
흔히 차트 없는 병원을 떠올리게 하는 EMR은 의료정보화의 핵심영역으로 선전되고 있으며 환자 중심의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의료정보화 달성을 위한 EMR은 환자의 신상정보와 병력정보를 비롯해 진료와 관계된 모든 정보를 컴퓨터상에 코드화하고 등록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익히 알려진 명분과 달리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환자의 개인정보보호의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병원노동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차트 없는 병원이 되면 의료의 질이 향상되고 환자 중심의 의료체계가 확립되는 것일까? 환자개인정보가 줄줄 새나가고 있고, EMR 운영의 파행적인 문제를 일선 간호노동자들이 모조리 떠안고 있는데도 말이다. <병원전산화 신기술 도입과 노조대응방안 연구팀>에서 10월 서울대병원을 사례 조사한 설문결과를 보면 문제가 한층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MR 도입 이후 업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6.1%가 정신적 피로감이, 52.2%는 육체적 피로감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업무스트레스가 늘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55.1%였으며, 직업병과 산재가 늘었다고 응답한 비율도 49.3%나 되었다. 업무량이 늘었다는 응답자는 51.8%, 업무범위가 늘었다는 응답자는 48.9%였다. 기존 하던 일에 새로운 일이 추가되었다고 답한 응답자가 39.8%나 되었기 때문에 업무 하중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병원에서 2004년 10월 EMR을 도입한 점을 감안, EMR을 1년 경험한 노동자와 2년 이상 경험한 노동자의 인식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고, EMR 도입 이후 업무변화와 EMR 경험연수를 교차분석 해보았다. 그 결과 EMR 경험연수 1년인 응답자와 EMR 경험연수 2년 이상인 응답자들을 비교했을 때 가장 주목해봐야 할 항목은 업무스트레스로, 이 경우 EMR 경험연수 2년 이상인 응답자들은 EMR 경험연수 1년인 응답자에 비해 무려 39.3%나 많은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EMR 도입 이후 EMR 경험을 많이 한 노동자일수록 업무스트레스, 정신적 피로감, 직업병과 산재, 육체적 피로감 등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또 일상적인 업무내용이라 할 수 있는 업무량, 업무속도, 업무범위 등의 증가에 대해 민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EMR 도입 이후 이러한 업무내용 상의 변화는 노동강도가 세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어 의료의 질 문제를 곧바로 대두시킨다.

<EMR 도입 이후 업무와 관련하여 나타난 변화의 정도>

병원 전산화 신기술 도입과 노조의 대응방안 연구팀, 2006.9 (괄호 안은 %)

상식적으로 환자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가 될 수 있으려면, 일차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병원노동자들의 상태가 좋아야 할 것이다. 병원노동자들이 일이 많아져 스트레스가 폭증하고 병까지 얻는다면, 아무리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자기 몸도 안 좋은데 환자에게 좋게 대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 병원이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더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한다면, 우선 의료서비스를 행하는 노동자들이 편하고 즐거운 환경 속에서 일할 때 환자에게도 좋은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다는 사소한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MR 도입으로 속도가 빨라져 더 많이 일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는 간호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록시간도 늘고 인계시간도 늘어났어요. 간호사가 하는 스크린, 검사 수도 많아졌구요. 속도가 빨라지니 일이 많아지구요. 몸이 망가지는 걸 느끼죠. 컴퓨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니까. 다리 붓고 몸 망가지고...”
“노 페이퍼, 차트 없는 병원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노동자에게는 일만 더 많아지는 거지요. 조회가 빠른 거, 바로바로 체크가 가능한 거 빼면,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다고 봐야 돼요. 일단 기록할 게 많아졌어요. 덩달아 검사건수도 많아졌구요. 환자 재원일수 줄어드는 걸 보세요. 사실 환자에게 좋아지는 거 별로 없어요. 병원이 돈벌이하는 거죠.”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노동자들의 업무환경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간호노동자들의 죽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장노동자들은 일의 속도가 빨라지니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면서 정보화된 만큼 일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의 양만 많아진다고 호소했다. 더구나 사람의 일을 전산이 대신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고용불안이 커진다. 차트를 가져오는 일을 담당하던 간호조무노동자들의 일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의료정보화로 인해 각광받는 부서인 방사선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병원의 수익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보험사처럼 그날 실적이 그날 다 뜨게 되어 내부경쟁을 엄청나게 조장하기까지 한다. CT, MRI 과정에서 나오는 환자의 영상은 스캔 이미지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이 시간조차 여유롭게 주지 않으며 빨리빨리 돌리라고 채근한다. 이쯤 되면 병원의료정보화는 환자회전율 높이기에 다름없다는 것이 판명 난 것이 아닐까. 병원의료정보화는 결코 병원이 공공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길이 아니다.

과다한 업무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이 환자에게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고용불안을 느끼게 되면서 안정된 직장이라 느끼지 않는데 병원을 위해, 환자를 위해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병원이 환자에게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문제가 선행되어야한다. 첫째, 현장노동자들이 격무에 시달리지 않는, 일하기 좋은 직장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며, 둘째 내방환자들이 맘놓고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어떠한 경우에도 환자개인정보가 철저히 보안 유지되어야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을 때 의료정보화가 여는 새 세상(E-Health)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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