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수: 10744 / 추천: 587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울리는 연사의 발언, 당위성을 띤 어미로 문장이 완결될 수밖에 없는 성명서 한 구절에 촘촘히 박혀있기 마련인 신자유주의나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마냥 익숙하고 누군가에게는 자주 지긋지긋할 수 있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대출은 0000-0000!"이란 명랑한 음성이 반복되는 텔레비전의 광고, '여성환영' 등의 문구가 포함된 공중화장실에 부착된 조잡한 디자인의 스티커, 미수금이란 단어가 찍힌 길거리에 나부끼는 형광색 현수막, 그리고 '신용불량자'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단신 기사가 되어버린 IMF 이후 약 10년, 대한민국 풍경 한 토막을 담고 있다. 파산이란 거대한 소재를 분석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면서 이미지의 나열과 충돌, 사운드의 운용으로 파산을 기술하는 영화적 접근이 돋보이는 독립 다큐멘터리이다.
인력시장을 연상시키는 취업시장 인파들의 적당히 긴장되고 굳어진 얼굴과 광화문 지하철 역사 한복판 즈음에 있을법한 '프로페셔널이 되라'는 사무용품 광고판의 조우. 영화는 충돌할 법하지만 실은 일상에서 조용하게 동시에 마주하기 일쑤인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반복적으로 나열하며, 통계 수치만으로 판명할 수 없는 그저 무던하게 노동을 수행하는 얼굴들과 몸짓들 사이에 배어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좁은 아파트 벽면에 걸려있는, 단란한 한때를 판 박아 놓은 사진이, 빨간딱지가 방안을 선명하게 메우는 암전과 정적이 찾아드는 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
영화에는 애써 비정규직이라고 명명하지 않더라도 출퇴근 시간이 언제이며, 몇 번 직장을 옮겼으며, 한달에 100여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는다는, 너무나 친밀해서 한두 문장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가 등장한다. 감독은 변화와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위안이나 나중에 잘될 것이라는 다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사회에 순응한 자, 깨우침을 받아야할 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터뷰이들을 일상과 분리된 공간으로 불러 카메라 앞에 앉히며, 비슷한 질문을 던진 후 몇 명 인터뷰이의 발언을 짧게 끊어 편집하면서 보는 이의 감정이입을 배제시킨다. 카메라는 인터뷰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으며, 모니터가 비추는 이들의 인터뷰 장면을 관찰하면서 거리를 유지한다.
이어 화면 가득 채워진 잘려진 신체의 절규는 파산의 현재이다. 이 영화에서 파산은 법률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금융피해자가 맞닥뜨려야할 물적, 심적, 사회적 관계의 총체적 파산을 말한다. 한달 내내 빚만 갚느라 정신없이 이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맨몸으로 길바닥에 내던져지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여 병원을 가지 못한 채, 아픈 아이를 부둥켜 앉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생생하게 사회의 차디찬 밑과 맞닥뜨리며 자존감을 상실해야 하는 이들의 눈, 입, 목소리는 광포한 철거 작업이 남기고 간 폐허 더미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정책, IMF 이후 서민들의 소득이 줄어들자 내수 시장의 소비 축소를 우려하여 신용카드 발행을 남발하고 이어 필연적으로 발생한 카드부실문제를 카드이용한도를 낮추어 봉합하려 했던, 파산을 야기한 사회구조적 문제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투명한 와인잔을 부닥치며 명함을 주고받는 세계경제포럼 홀의 부감 장면과 대부업무 담당자의 흔들리는 발언을 금융피해자들의 인터뷰 장면과 교차편집하면서 도덕적 해이라는 그물망으로 이들을 옭아매려는 현실을 비판한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는 가족찾기 프로그램의 출연자와 이들을 딱하다고 위로하는 아나운서의 인자한 목소리는, 천 조각 너머 실루엣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금융피해자에게 "매월 858,000원씩 96개월을 갚을 수 있겠느냐"는 꾸짖음 섞인 목소리로 채근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참 다르다. 자성의 다짐을 연발하는 금융피해자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감독이 선택한 시간여행의 출발점은 국토건설사업 등이 시작될 무렵 그 어디쯤이다. 영화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기, 금 모으기 운동, 화해를 강조하는 노사정위원회의 설치 등 상생을 내세우며 개인의 부지런함을 강조해온 시간의 물줄기를 정부의 홍보용 영상자료를 편집하여 보여주며, 도덕적 해이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
사회의 잔인함을 맛보면서도 이를 적당히 체득했을, 새 세상이 왔다며 시청 광장의 푸른 잔디 위에서 열린 요란한 문화제에 전대협을 추억하며 팔뚝질을 하는 386세대는 책망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집행자'인가?
정서를 안정시켜준다는 차분한 음악이 소란스러운 지하철 플랫폼 어딘가에서 흘러나온다고 할지라도 지하철 선로 위로 안착하려는 누군가의 뜀질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