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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좋은데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드는’ 만화가가 있다. 만화 작가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그렇다. 물론 이건 오로지 그에 대한 나의 질투와 시기의 표현이다.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 태도가 부러운 것이고, 또 결과를 보면 내가 못하는 걸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부터 그랬다. 그의 전작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꽃>이다. 전 4권짜리 장편이다. 첫 작품으로 장편을 한다? 맘에 안 든다. 작가도 비싸서 갖고 있지 않은 작품이다. 이점도 맘에 안 든다. 게다가 내용은 빨치산 얘기다. 빨치산을 다뤄서가 아니라 쉽게 할 수 없는 얘기를 했다는 점이 맘에 안 든다. 다음은 오늘 소개할 노근리 얘기이고, 이 얘기가 마무리 되면 제주도로 내려간단다. 뭐하러? 당연히 4.3이다. 현대사를 꿰뚫고 있다. 흠... 역시 맘에 안 든다. 사람은 또 어떤가. 그를 가까이서 보게 된 것은 우리만화연대에서 하는 만화아카데미에서다. 만화의 기초 부분에 대한 강의를 부탁드렸는데 인기가 짱이다. 맘에 안 든다. 게다가 총각이기까지 하다. 인간성 좋은 총각 선생님이라... 당연히 경쟁이 안 된다. 결정적으로 맘에 안 드는 대목이다.
맘에 안 드는 건 그렇다 치고 아무튼 본론에 들어가 보자.
일단 그가 다루는 주제들이 가볍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의 아픈 현대사를 차근차근 밟고 있다. 해방 후와 한국전쟁을 두루 담아내고 있다. 누구나 알지만 또 잘 모르는 역사이다. 익숙한 만큼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얘기의 특징이 다루기 쉬운 듯하지만 다가 갈수록 갑갑해지고 신경 쓰이는 게 많아진다는 거다. 근데 주제가 무거운 만큼 더 묵직하게 담아낸다. 그걸 그리 척척 담아내다니... 맘에 안들 수밖에 없다. 그가 대충 작업한다는 말이 아니다. 꾸준히 차곡차곡 커다란 배를 만들 듯이 6개월, 1년, 2년 작업을 해내는 것이다. 당연히 옆에서 보는 나 같은 인간들에겐 그 과정의 어려움은 온대간대 없고 한손으로 들기엔 무거운 작품만 보이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떻게 한번에 600여 쪽을 그려내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라 이게 1부다. 내년 유월에 출간 예정인 2부가 약 400쪽이라니 합이 천이다. 저절로 혀가 내둘려진다. 이전 작업인 <꽃>도 일단 양에서 사람을 기죽게 하였다. 그의 출판기념회 겸 전시회에 가서 다들 놀랐던 게 어마어마한 작업량이었는데, 예의 그 일을 또 해낸 것이다. 그만의 작풍이라고 우기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이건 단순한 허풍만은 아니다. 한국의 만화판에서는 연재했던 작품들을 모아내는 게 보통이다. 잡지나 일정한 지면에 한동안 그렸던 것을 모아서 단행본을 만든다. 결과적으로는 수십 권도 나오므로 쪽수로만 따지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질적으로는 좀 다르다.
연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쪼개서 그리는 게 아니라 연재하는 지면의 양에 맞게 연출을 하고, 또 그 안에 작은 이야기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마스터키튼>처럼 매회 다른 소재로 이야기가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도 그렇다. 아시겠지만 일일드라마는 큰 틀에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하루 방송 분량 안에서도 기승전결이 있다. 만약 그 일일드라마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야기의 흐름은 또 달라질 것이다. 작가에게 확인한 바, 영화를 만들 듯이 작업하고 싶었단다. 나는 단순히 연재하기가 애매하니까, 또는 잘 실어주지 않아서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 연재가 잘 맞지 않아 그런 식으로는 작업하기 싫었던 것이다. 보통은 연재할 곳이 없으면 굶기 십상이요, 데스크가 안받아 준다고 좌절을 하거나 최소한 불안해한다. 하지만 그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호흡을 끌고 가고 싶고, ㅤㅉㅗㅈ기 듯 작업하는 게 아니라 발동이 걸릴 때 작업을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렇게 작업 할 뿐이다. 이런 우직한 단순함도 맘에 안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꽉 잡고 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게 일반적인 데가 유럽 쪽이다. 하지만 양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대개 그런 식으로 작업해서 일년에 평균 60쪽 정도. 정말 많아야 100여 쪽이다. 근데 600쪽이라니...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만화를 하는 순간부터 귀신에 쫓기게 된다. 바로 마감 귀신이다. 마감이 있어야 작업을 한다는 작가도 많다. 만화가들에게 마감에 얽힌 얘기만 그려보라고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이때 마감이라는 게 하루, 일주일, 격주, 한달, 단행본으로 180여 쪽 해도 두세 달에 한번 씩 오는 거다. 근데 2년 마감이라면 마감이라기보다는 완성된 날이라는 게 더 어울리겠다. 흠, 다시 한번 더 그만의 작풍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겠다. 따라 할 수가 없으므로 가랑이 찢어질 일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않은가.
<꽃>이 판화 형식이었다면 <노근리 이야기>는 한국화의 형식으로 작업을 했다. 이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그저 펜과 먹으로 요즘은 컴퓨터로 만화를 그리는 게 전부인 내게는 이런 점도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참으로 여러 면에서 맘에 안 들게 한다. 이렇게 맘에 안 드는 작품과 작가는 하지만, 제발... 제발 많았으면 좋겠다. 늘 하는 얘기지만 한국 만화판은 앞으로도 한참 더 다양해져야 한다. 그게 한국만화의 살 길 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