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4호 북마크
만국의 노동자여, 유목민이 되라?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제국(Empire)』, 이학사, 2001

윤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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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년 전에, 유럽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회자되던 유령 하나를 실물화 시키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절규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러나 ‘만국의 자본가’를 떨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던 이 외침은, 당위로서야 21세기에도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있지만 실질적 현상태로는 아직 결과의 달성이 요원해 보인다. 자본의 세계화전략은 이미 국경이라는 인위적 장벽을 멋대로 주무르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은 개별 사업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충분하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총공세에 응전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지형에서 유토피아적 미래를 제기하는 방식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시대’가 이제 끝났다고 네그리와 하트는 주장한다. 우선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이미 국제적일 뿐만 아니라, 경향적으로는 전지구적이다. 투쟁은 각자의 맥락에서 ‘적합한 숙주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을 조율하는 바이러스처럼 소통’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상황의 변화는 자본이 국민국가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경계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치계급적 주체는 대중으로 전화된다. 부르주아의 성장이 프롤레타리아를 낳았듯, 탈영토화의 기제 속에서 작동되는 전지구화는 대중들이 해방되는 조건으로 존재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에서 투쟁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던 ‘제국주의’의 주체인 ‘제국’과는 전혀 다른 ‘제국’을 들고 나온다. 이제 새롭게 도래할 ‘제국’은 전체주의적 통제구조와 수탈적 식민정책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국가태가 아니다. 개방적이고 팽창적인 자신의 경계 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통합하려는 제국은 ‘탈중심화 되고 탈영토화 하는 지배장치’로 나타난다. 그 결과 제국은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상품의 생산과 이를 통한 이윤의 추구라는 근대 자본주의 생산체계는 삶 자체를 생산하는 형식으로 전환되어 제국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의 제국은 통상적 의미의 역사성을 탈피하여 ‘역사의 극한’에 있는 체제가 된다. 그리하여 제국은 사회생활 전체를 지배하며, 생체권력의 형태를 지닌다. 이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제국에 대한 투사로서 탈영토적이며, 유목적이며, 자율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 저술한 ‘제국’은 그동안 전방위적 자본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만한 거대담론의 구조를 찾지 못했던 변혁세력에게는 분명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다.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제국은 강제적 권력의 규율의 관성을 벗고 내재화된 훈육의 메커니즘을 욕망으로 전이시켜 대중을 포섭하고, 이 과정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억압이 기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제국’의 통제기제에 맞선 민중의 저항은 이들이 쳐 놓은 울타리를 넘어 이루어져야만 한다. ‘제국’의 범주 안에서는 결코 ‘제국’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유통이 네트워크를 통해 광속으로 이루어지고 그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는 대중을 장악할 때, 신자유주의로 명명된 이러한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시민권’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필수적이 된다. 이를 위해 대중은 ‘자율적인 생산 담지자가 되는 기계 및 기술의 새로운 사용 가능성을 인식’해야 하고, 이 각성을 통해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정보화된 생산체제와 일치하는 노동자 전투성의 국면에서 사회적 노동자라는 형상이 등장한다.’

특히 ‘제국’에서 중요시되는 몇 가지 개념 중 유의해서 바라볼 것은 ‘정보화’와 ‘네트워크’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근거로 각 영역에서의 기동이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지를 구별하여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온라인의 분야건 오프라인의 분야건, 정보화 현상과 정보화를 매개하는 네트워크는 자본에게는 중요한 계급적 억압의 기제인 동시에 대중에게는 그들 특유의 자율성과 유목성을 아낌없이 발현할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바로 여기서 ‘제국’이 펼치는 논리는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국제전화를 연결하고 장시간 통화를 하며, 자료와 물품을 해외로 송출하고 내키는 대로 항공티켓을 끊어서 국제선 항공기를 타고 날아가는 자본가들에 비교할 때, 가진 것이라고는 맨주먹뿐인 대중들이 자본가들과 같은 기동성과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는 결국 정보화와 네트워크로 귀착된다.

노동해방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거대담론이 미시논의에 밀려 그 정체성조차 희석되어가는 마당에 다시금 사회상의 전반을 꿰뚫어보고 이에 대한 총체적인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제국’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왠지 답답하다. 과연 우리는 네그리와 하트가 자신 있게 공언하듯 ‘거대 정부는 끝났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전 대중이 노마드가 되어 제국의 그물망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것이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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