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4호 표지이야기 [경영정보시스템의 뒷면]
ERP를 거부하는 노동자
ERP 노동강도를 높히고, 고옹불안을 야기한다

장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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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한 경제신문에 “노동계 ‘안티정보화’ 거세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노동자가 정보화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이 소개한 안티정보화의 사례에는 잘 알려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NEIS 반대운동 외에도 전북대병원 노동자의 ERP 반대 운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NEIS 반대운동이 이 신문이 지적한대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인지는 다음 기회에 따져보기로 하고 전북대 병원 노동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ERP를 거부했는지 들어보자.

전북대병원은 병원업계 최초로 ERP를 도입하였다. 그런데 2003년 시험가동을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간호사들의 말에 따르면 ERP가 도입되면서 원가절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 물품 하나하나 가격이 매겨지고 업무가 규격화되면서 병원이 병원 같지 않아졌다고 한다. 수액주사 꽂는 자리에 붙이던 반창고 길이가 짧아지고 수술환자 소독이 매일 한번에서 이틀에 한번으로 줄었다. 매일 갈던 중중 환자의 시트와 환의도 2~3일에 한번씩 갈게 되었고 때로는 1회용 물품도 물로 씻거나 재소독해 다시 사용했다. 간호사들은 간호보다 물품관리에 신경쓰게 되었다며 분통을 토했다.
전북대병원 노동조합 유선영 조사통계부장은 “수익 중심의 원가절감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는 ERP가 공공의료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훼손시켰다”고 비판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ERP가 그간의 단체협약이나 노동환경 개선 노력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이런 문제의식을 과연 시대착오적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을까.
ERP에 반대하는 것은 병원 노동자만이 아니다. 지난 2001년 대전 한라공조에서 ERP 시스템을 도입하자 노동자들이 반대하였고 (주)만도에서는 노동조합이 맞섰다. 한라공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설문조사에서 “은근슬쩍 노동강도가 세질 것이다”, “하루 천 개 나오던 라인에서 1,200개, 1,300개 뽑아낼 것이다”라고 답했다.
2003년 7월 한길리서치연구소가 노동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과 함께 조사한 결과에서도 노동자들은 ERP가 작업량이나 작업속도 등 노동강도를 강화시킨다고 보았다(중복응답비율 49.8%). 노동자들은 ERP가 인사관리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50.5%) 특히 ERP로 고용불안을 느끼는 노동자는 51.1%에 달했다. 불안은 연령이 높을수록 커졌다. 노동자들은 ERP가 조기퇴직자(Early Retired Person)의 준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ERP에 대해 느끼는 불안의 핵심은 ERP가 노동자 본인의 노동조건이나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데도 노동자에게는 그 도입과 운영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강석재 교수(안양과학대학)는 조선산업에 도입된 컴퓨터통합조선시스템에 대한 연구에서 이 시스템이 노동자와 갈등을 빚은 이유는 운영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산업에서 용접공수는 컴퓨터로 계산되지만 계산할 때 고려되는 내용은 표준작업시간·생산성계수와 같이 상당부분 사람이 결정한다. 특히 표준작업시간과 같은 것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직접 관계가 있는데도 노동자들은 이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채 계산되어 나오는 수치에 맞추기만을 요구받았다. 노동강도의 관리가 상위 경영층에서만 결정되고 노동자에게는 ‘블랙박스’가 된 것이다.

노동자가 ERP의 운영을 결정할 수 있어야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이황현아씨는 “ERP에 대한 노동자의 의견제시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용자는 ERP 시스템에 대해 노동자에게 숨김없이 공개하고 설명해야 하며 노동조합이 요구할 경우, 회사는 ERP의 도입이나 운영에 대한 교섭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ERP가 과거의 기업 정보화와 다른 점은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정보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주장이 커지고 있다. 이씨는 ERP 작동으로 만들어지는 기록물은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며 ERP 작동으로 수집된 개인정보가 노동자를 차별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경우 노동조합은 지방정부와 함께 ERP에 대한 기술영향평가반을 구성한다. 특히 ERP 패키지인 SAP R/3에 대해서는 전담 전문가 20여 명을 확보하여 자세히 분석한다. 물론 ERP 도입 여부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이 ERP의 운영에 대해 일정하게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8월 전북대병원 노사의 합의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이 합의문에는 △ ERP 자료로 노동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으며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 직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이를 활용할 때 노동조합과 합의한다 △ ERP로 취득한 환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한다 △ 정보화 기술을 도입할 때 노동조합과 사전에 협의하며 근로조건과 관련된 사항은 노동조합과 합의한 후 시행한다 △ 노사가 실무협의체를 구성하여 ERP의 운영사항을 논의한다는 등 7개 사항이 담겨 있다.
유 부장은 “실무협의체를 통해 ERP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면서 ERP가 조합원과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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