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5호 영화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하잖아”
베터 댄 섹스 / 감독 : 조나단 테플리츠키 / 출연 : 데이빗 웬햄, 수지 포터

홍문정  
조회수: 9278 / 추천: 57
#1 대화
축 늘어진 어깨에 피로한 모습의 수험생 아들은 냉랭한 타인들만 스쳐가는 밤거리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안쓰러워하는 엄마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린다. 아들과 엄마 사이에는 방문이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다. 문 밖에 남겨진 엄마는 무엇을 할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바로 이렇게 가로막고 있는 숱한 문들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아들은 습관처럼 들어간 사이버 공간에서 뜻밖에, 아주 뜻밖에 깜박깜박 대화를 신청하는 엄마를 만난다. “엄마, 언제 배우셨어요?”, “우리 아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배웠지.” 이미 유명해진 공익 광고의 한 부분이다.
대화의 방법이란 인간 관계의 종류를 다각도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정말 친한 친구에게도 하기 힘들었던 속내의 얘기를 집에 가는 길목에 오뎅 장수 아줌마에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 관계와 대화의 함수는 간단하지 않다.

#2 섹스
쿨(cool)한 것이 대유행인 세상이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모두 바람이 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일면 콩가루 집안의 이들은 애정으로 맺은(것으로 믿었던) 가족 관계가 와해되는데도 전혀 서러워하거나 비정해지지 않고, 한마디로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하게 처신하(는 듯이 보이)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한 시사주간지는 ‘쿨’한 것이 멋진 인간의 첫째 조건이 된 사회 현상을 기획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쿨하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규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인간 관계에서 적어도 전통적으로 인간 관계의 지속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였던 중요한 가치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랑해”라는 말은 영속적인 미래를 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 관계는 언제나 적절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관계를 전면적으로 통합하거나 분리하지 않도록 통제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관계를 전면적으로 얽어매지 않는 섹스, 즉 관계간의 의사 소통 방법으로서 섹스는 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좋은 화제 거리다. 전 인생을 걸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얘기해 봤더니 잘 통하더라’는 식으로 섹스를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로 하는 대화가 누구하고나 잘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말이다.

#3 사이버 공간
신기하게도 인기 만발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단연 채팅 사이트와 포르노 사이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대화와 섹스는 초유의 관심사이며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일종의 관계망이다. 사이버 공간의 네트워크는 사뭇 다른 사고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길 요구한다.
옆집 사는 돌쇠네 숟가락이 몇 벌인지를 꿰고 있으면서 점심 때 먹은 열무 김치의 고춧가루가 이층에 끼어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채팅 사이트에서 만난 아무개와 지난 여름 자살한 동생에 대해 후회스러운 심정을 나누는 것은 다르다. 만일 돌쇠네 누군가 자살을 했다고 하면 오히려 아무 얘기도 꺼내지 못할지도 모르며 아무개의 이빨은 보이지 않으니 열무 김치의 고춧가루가 크던 작던 얘기할 거리가 없다. 시답지 않은 비유 같지만, 대면 환경에서의 인간 관계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간 관계는 성격과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 채팅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개설된 방 이름이 아예 노골적으로 섹스할 대상을 찾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들이 많다. 얌전히 대화가 하고 싶다 하더라도 여기저기서 쪽지가 날아 들고 얼추 인사가 끝나면 곧장 섹스 얘기로 돌입해서 아연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이버 공간은 그저 ‘익명성’이라는 특징만으로 교묘하게 상대를 물색하는 24시간 편의점인가? 그것만으로는 가상 현실조차 가능하게 하는 사이버 공간의 무한한 잠재력이 아깝지 않느냔 말이다.

#4 better than sex
이제 본론에 들어간다. 2000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 2003년에 개봉되었다. 파티에서 만난 여자와 남자가 그저 즐기려는 생각으로 원나잇스탠드를 시작했다가 남자에게 허용된 사흘을 꼬박 채우더니, 별 스토리도 없는데 한편의 깔끔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여자의 집 내부가 고작인 영화속 공간에서 둘은 사흘을 뭉개면서 지치도록 섹스를 하고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의 혼란을 느끼면서, 수순대로 바이바이를 하지 않고, 결국은 서로의 옆자리를 내어준다. 사랑한다면 몸을 비빌 수 있다는 순서가 아니라 그 반대다. 그런데 그것이 ‘better than sex’인 무엇이라는 것이다. 사실 둘은 사흘만 바짝 즐기고 말 것이었기 때문에 그 무엇을 자꾸 느끼면서도 솔직하게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농담처럼 “가짜 전화번호 적어 놓을게”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짐짓 쿨한 듯 굴지만, 양말 한 짝씩 느릿느릿 챙겨 입는 남자와 그의 발에 자기 발을 얹고 함께 움직이는 여자, 그 둘의 발의 움직임은 이별하기 싫어하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정작 쿨하다는 것은 ‘안녕’이라는 말을 상쾌하게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끌림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창 흥행 수위를 달리는 한국 영화의 카피에 ‘통하였느냐’라는 것이 있다. 그저 길이 통하는 것은 sex요, 이끌림의 감정이 통하는 것은 better than sex다.

#5 better than …
사이버 공간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길은 길이요 그 이상이 아니다? 느낌이 있는 사이버 공간, 이끌림의 느낌대로 갈 때 산보가 즐거워지는 길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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